B의 슬픔을 위한 C

아이다호의 스틸을 보면서 구스 반 산트가 아이다호를 찍었을때 거의 지금의 나의 나이와 비슷하다는것을 깨달았다. 20년 전에 내가 그것을 보았을때 나는 리버피닉스의 나이와 같았기 때문에 이 영화가 너무나 쓸쓸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다시 그 스틸을 보니 아이다호는 마흔살이 기억하는 스무살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길에 버려지는 청춘은 차란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다호가 끝내 먹먹한 이유는 산트가 끝내 영화속에서 리버피닉스를 살려두었기 때문이다. 스코트의 배신에 리버피닉스 대신 영화에서 자살한건 밥이다. 리버피닉스는 영화에서 살아남았음으로 영화가 상영될때 마다 계속 버려질 것이다. 영화에 관한 현실의 응답. 그래서 리버피닉스는 현실에서 죽어버린다. 그 이후 산트는 영화의 인물들은 계속 죽여버린다. 거기에 혹시 구원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5일에 카페느와르를 예매했다. 정성일 선생님은 기필코 영화에서 인물들이 죽는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결국 영화는 우리의 현실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살아서 고통받는냐 죽음으로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살아서 함께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믿는것 같다. 오늘, 허우샤오시엔의 빨간 풍선을 봤다. 수잔의 집엔 사람들이 들어오기는 하는데 나가는 장면이 없다. 그리고 들어오는 문 반대편 같은 위치가 부엌으로 막혀있다. 말하자면 이집은 들어오면 나갈수가 없는 집이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데 수잔의 집은 빠져나가지 못한 삶의 슬픔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허우샤오시엔은 주방에 현관 만한 창문을 만들고 그 창문을 열어준다. 첫 시퀀스에서 이것을 암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새로운 보모로 온 ‘송’이 갑자기 차문이 열리지 않자 수잔이 운전석 문으로 내리라고 반대편의 문을 열어준다. 그 집의 삶의 고단함의 정체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아들이 피아노를 배울때 그 집의 슬픈 울림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허우 샤오시엔은 수잔이 아랫층 남자와 집문제로 싸우던날 맹인 조율사를 불러서 피아노를 튜닝한다. 삶의 슬픔은 모두 제 자리를 찾아 그 창문으로 나갔으리라 믿고 싶다. 영화는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수많은 돈과 인력들을 필요로 하는 반면 음악은 이 이야기들을 혼자서도 보여줄수 있다. 벤자민 젠더의 TED강연 중 연주해준 쇼팽의  한 곡에도 이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B의 슬픔을 위한 C. 여러 감정이 뒤범벅에 되버려 강의을 보는 내내 행복으로 웃다가 급기야 눈물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