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타임

25일 크리스마스를 맞아하여 힐러 3명과 파티를 맺고 힐링에 버프를 받으러 벙커1에 갔었다. 선거에 승리했으면 축제분위기였을 벙커는 사람이 북적북적해도 어딘가 서늘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김총수와 주기자는 한국을 떳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에리카’노와 비비케이크, 조롱과 풍자가 넘쳐나는 이 메뉴판은 레이디 가카가 펼치는 ‘새마음운동’ 시대를 맞이하야 언제까지 유효할지 모르겠다. 슬프다. 자본앞에 가치가 무릎꿇는 시대여. 올해 칸느의 선택은 미카엘하네케의 ‘러브’다. 우리가 세상을 통하여 얻는 관념들, 혹은 우리가 인지하는 실재의 실체를 뒤집어 버리는 그의 영화들을 생각할때 그의 ‘러브’는 세상의 모든 ‘러브’와는 다를 것이다. 그가 피아니스트에서 보여준 사랑, 자신을 버린 사람앞에서 버려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찔러버림으로써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게 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번에 보여줄 사랑 또한 예사롭지 않을 것이다.’ 칸느에서 아무르가 그랑프리를 거머쥐었을때 페북에다 이런 글을 쓴적이 있다. 그러나 너무나 기다렸던 아무르는 절반의 영화였다.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로 보자면 새로울 것이 없었다. 사랑 또한 그냥 예사로왔다. 영화속의 집의 구조와 비둘기는 허우샤오시엔의 영화 [빨간풍선] 의 집의 구조와 풍선과 이상하리만큼 닮아있었고 그것이 상징하는 바도 같았다. 말하자면 한번 들어오면 나갈수 없는 집. 잠글수 없는 수도꼭지. 그런 삶의 무게. 단지 [빨간풍선]속에선 희망을 위해 창문이 열려있었다면 [아무르]에선 함께 죽어서 나가는 통로로 창문이 열려있다. 아무르에는 우리의 관념을 뒤집는 대신  그자리에 허물어져가는 육체가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 생생해서 직접적으로 피부에 느껴지는것 같았다. 깊게 파인 주름과 늘어진 피부가 선명했다. 중간중간 슈베르트의 음악이 흐르는 동안 나의 이성과는 관계없이  눈가가 젖어왔다. 올 해 처음 본 자전거를 탄 소년의 베토벤 황제가 위로의 음악이었다면 아무르의 슈베르트는 슬픔의 음악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미카엘 하네케에게 이런 것을 기대한건 아니었다. 한해가 저문다. 저기 철탑에서 목을 매달고 세상에 소린친 울림을 보며 미치고 싶어도 미쳐지지 않는 현실을 떠올린다. 일단 앞으로의 5년간은 티비 뉴스를 보지 않기로 맹세한다. 보여주다/ 수용하다의 관계를 차단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해던 이상들, 그 실패한 이상이 나를 찾을수 없도록 더 먼 이상을 향해 떠날 것이다. 거기 어디서쯤 우리가 다시 만나겠지. 그래, 다시 만나자. 사람이 더 사람답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당연한 어디쯤에서. 사람이 먼저니까.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