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아워

영화가 시작되자 카메라는 트랩을 따라 가다 터널로 들어간다. 터널의 어둠속에서 출구가 보이는데 줌인 트랙 아웃을 쓴 것처럼 가도 가도 출구가 다가오지 않는다. 급기야 출구에 다가가자 순간 갈라진 세계. 그리고 카메라는 트랩이 반대로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첫씬은 해피아워의 주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원히 못빠져 나가는 동굴. 하나가 될수 없는 세계. 앞으로 가고 있으나 실상을 뒤로 가고 있음으로 제자리에 놓여진 인물들.
영화 해피아워의 총체는 대화다. 인물들은 계속해서 말하고 듣는다. 말과 듣기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왜 말은 할수록 서로 어긋나는 것일까? 영화는 내내 그것을 보여주는 장면들의 반복이다. 예를들면 ‘중심의 소리를 듣기’ 워크샵이 끝나고 뒷풀이 씬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이 대화를 하는데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한프레임에 놓고 찍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람이나 중요한 사건을 듣는 사람에게 포커스가 맞춰져야 하는데 이 테이블의 대화는 그렇지가 않다. 때로 말하는 사람을 프레임 구석으로 몰아넣고 듣는 사람들 위주로 영화를 찍었다. 말이 드러내는 사건보다는 테이블이 가로막은 사람간의 거리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중요한것 같다. 그리고 이 대화에서 말하기와 듣기는 실패하고 친구들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 테이블 씬은 영화의 핵심을 다 담았다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뒤에 이 장면을 다시 이야기 할 것이다). 사쿠라코의 남편이 쥰을 자동차로 역까지 데려다주는 장면도 그렇다. 여기서도 카메라는 말하는 사람을 사람을 따라가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듣는 쪽에 카메라의 시선이 간다. 듣기. 이해하기. 그러다 카메라가 갑자기 투샷으로 두사람을 한 프레임에 잡는다. 이것은 일반적인 기법으로 대화하던 사쿠라코와 쥰의 남편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투샷부터 두사람의 대화가 갈라지기 시작한다. 듣기의 실패. 말하기와 듣기의 불가능성. 그것을 한프레임에 억지로 끼워넣는다. 이것이 해피아워의 세계다. 성공처럼 보이는 대화도 있다. 쥰은 온천여행에서 사진을 찍어준 사람을 버스에서 만나다. 그들은 웃으면서 대화를 이어나간다. 소소한 삶의 이야기. 처음보는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즐거운듯 보인다. 하지만 카메라는 그 둘이 헤어지는 순간까지 둘을 샷, 리버스샷으로 갈라놓았다. 버스의 삐걱거림과 창밖의 소음은 그들을 대화를 계속해서 방해한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준 사람이 버스에서 내리자 갑자기 세계는 지옥이된다.
해피아워의 가장 큰 특징은 관객을 계속해서 영화안으로 불러들인다. ‘중심을 듣는다’ 워크샵에서 카메라는 청중들 사이에서 청중의 등을 걸고 찍어서 마치 관객이 강의를 듣는 것처럼 찍었다. 또한 작가 노세의 소설 낭독회는 드러내고 관객에게 영화를 해석해주고 있다. 비유가 아니라 영화안으로 관객을 초대해놓고 벌어지는 해피아워GV이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네명의 친구들이 온천여행을 갔을때다. 여기서 오즈야스지로가 떠오르는 쇼트들이 이어진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대화하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서로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대화한다. 그러나 하마구치는 오즈와는 다른 방향으로 의미를 꺾는다. 오즈는 사람과 사람은 소통할수 없고 혼자라는 이유로 상상선을 파괴하는 촬영기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하마구치 류스케는 배우들은 관객에게 말을 걸어오는 중이다. 오즈의 인물들은 시선이 카메라를 살짝 벗어나 있지만 해피아워의 인물들은 카메라를 응시한다. 그러므로 말하는 맞은편의 대상이 아니라 관객에게 말을 걸고 우리가 듣는 것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사쿠라코가 말을 할때 우리가 맞은편의 쥰이 되기를 원하고 아카리가 카메라를 응시하며 말을 할때 후미의 육체로 우리를 불러낸다. 그래서 “소설자체가 체험이 되길 원하고 있습니다.” 소설 낭독 후 대담에서 쥰의 남편이 작가에게 말했듯이 하마쿠치는 우리에게 영화자체가 체험이 되길 원하고 있다.
두번째 특징은 주연 조연 상관없이 배우들에게 동일한 리얼리티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낭독회에서 설명해준 그대로다. 영화는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남편을 떠나는 쥰을 통해서 쥰과 세명의 친구들이 자신들의 삶을 각성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쥰, 아카리, 사쿠라코, 후미가 극을 이끌어가고 남편들은 여성들의 결핍으로서 대화 불가능한 대상이다. 그러나 영화가 후반이 되면서 남편들에게도 각각의 리얼리티가 부여된다. 사쿠라코가 각성후에 젊은 남자와 밤을 새고 들어온 아침, 그녀를 기다리던 남편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남편에게 다른 남자와 잤다고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1층으로 내려가다가 계단에서 구른다. 계단에서 구르는 장면은 주인공 중 한명인 아카리가 병원계단에서 구르는 것의 반복이다. 삶의 고통이 가해자로 보였던 대상에게도 똑같이 반복된다. 그리고 남편은 횡단보도에서 갑자기 주저앉아 울기 시작한다. 이 장면도 쥰이 플랫폼에서 주저앉는 것을 반복하는 행위이다. 사쿠리코가 남자와 밤을 새고 들어온 것은 바로 붙어있는 후미의 남편이 노세와 밤을 세고 새벽에 들어오는것의 반복이다. 쥰이 아이를 임신한것은 사쿠라코의 아들이 같은학교의 여학생을 임신시킨 그것이며 쥰이 어린남자와 외도를 한것은 워크숍에서 만난 카자마의 부인 이야기다. 그리고 쥰의 남편이 우리에게 직접 영화를 해석해줌으로 우리와도 이어져 있다. 대화가 불가능한 지옥도에서도 사람들은 모두가 이어져 있다. 영화가 관객을 소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관객의 참여로 영화 속 인물들에 부여된 어떤 사정들이 관객에게도 부여되었다는 사실이 자각되고 배우과 관객 모두에게 동등한 리얼리티를 부여된다. 그로므로 영화와 관객이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인물들이나 관객이나 결국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다.
결국 네명의 친구들은 새로운 삶을 살기위해 애쓰지만 아무것도 변한건 없다. 그들은 그 삶을 그냥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 그러나 나는 이제 그 세계에서의 희망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세미나를 주관하는 우카이 케이는 고베출신이다. 우리에게 고베는 1995년 지진의 도시이다. 우카이는 그 지진의 잔해더미에서 물건들을 세우던 사람이다. 우카이의 손길에 마술처럼 의자가 중심을 잡는다. 하마구치 류스케. 그의 영화에 항상 지진의 그림자가 있다. 그의 전작 도호쿠 3부작은 2011년 도호구 지역의 지진에 관한 인터뷰같은 영화다. 하마구치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아사코에도 지진의 그늘이 영화전체를 덮는다. 그 지진의 폐허에서 희망을 세우던 사람. 그 우카이가 우리에게 사람의 중심을 듣는법을 가르친다. 창자의 소리를 듣는법. 생각을 전달하는법. 우리가 함께 등을 맞대고 일어나는법.
이쯤에서 앞에서 이야기했던 테이블의 대화를 다시 불러오고 싶다. 그 테이블 씬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 우카이와 아카리에게 ” 간호사는 힘든 일이죠.”라고 말한다. 뒤이어 아카리가”진심으로 생각해본적이 없으면 말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자 우카이가 “죄송합니다. 간호사의 일을 알지도 못하면서 이미지만으로 말했습니다.”라고 답한다. 이어서 ” 이 기회에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간호사의 일은 어떻습니까?” 라고 질문한다. 여기에 아카리가 간호사의 고충에 대해 이야기하고 카자마의 이혼으로 이야기가 넘어간다. 그런데 갑자기 아카리가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카자마의 옆자리로 이동해서 어깨를 감싸고 러브샷을 한다. 영화 해피아워에서 이렇게 신체를 접촉을 하는 경우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 당황스러운 장면은 우카이의 대화 바로 다음에 이어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영화는 많은 장면들에서 대화도중 자리를 뜨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그러나 이 씬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화가 틀어지고 감정이 어긋나 대화의 자리를 떠나버릴때다. 나는 우카이와 아카리의 대화 중 어떤 부분이 아카리를 변하게 했는지는 알수 없다. 우카이가 아카리의 내면의 고충에 진심으로 귀기울여 주는 태도 때문이라는 해석은 너무 낯간지럽다. 우카이가 고베라는 지진후의 희망을 전하는 상징이라고 말하는것도 너무 뻔한 수습이다. 오히려 영화에서는 동생 히나코의 입을 빌려 우카이를 텅 빈 사람이라고 설명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바꿈은 해피아워의 기적이다. 또한 아카리가 우카이와 클럽에 가는 씬이 있다. 말이 들리지 않는 세계. 이 클럽도 우카이가 목발을 집고 걷기조차 버거운 아카리를 데려간다. 그런데 이곳엔 우카이의 동생 히나코가 있다. 여기서 아카리는 히나코와 입을 맞추고 다시 우카이와 입을 맞춘다. 이 씬 역시 다시 테이블의 자리로 돌아가야한다. 여기서 한 참가자가 우카이에 대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등과 등을 붙였다가 이마와 이마를 마주댔다가 그 다음은 입과 입을 대볼까요?”라고 우카이가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었을때 사람들은 절대 안된다며 모두 웃어넘겼다. 그런데 우카이가 이런말을 했었다. “그러면 서로가 좀 더 이해되지 않을까요?”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우카이와 입을 맞춘 아카리는 병원으로 돌아와서 자신이 다그치기만 했던 간호사를 감싸안는다.
해피아워는 비관과 희망 두개의 얼굴을 하고 있다. 어느것을 선택해도 맞는 선택이고 이것이 하마구치 류스케의 대단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삶이라는 잔해더미 속 희망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말의 거리, 인물의 거리, 대화가 실패하는 지점에서 끝없이 대화하려는 이 영화의 의지가 어떤 주제보다 빛난다고 생각한다. 당연하지만 하마구치 영화속 인물들의 절망은 사람과의 관계로 비롯되는 것이다. 그 자리에 타인이 있는 것이다. 타인과의 소통을 원하는것, 함께 있다는것 자체가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아핏차퐁의 고독에는 타인이 필요없다. 타인이 필요없으니 유령을 불러들인다. 홍상수의 영화속 인물들은 상대와 대화를 하지만 의미없는 말들이다. 그 대화는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해피아워의 영화속 고통은 선명하지만 희망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사쿠라코의 남편처럼 계단에서 넘어지고 신호등에 주저앉아 울고 있을때 계단에서 넘어진 아카리는 깁스를 하고 총총 뛰어다니는 장면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절망에 주저앉아 못 일어설때 아카리는 병원에서 침대의 사람들을 일으키는 간호사라는 것을 환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테이블의 대화로 돌아가야 겠다. 테이블 씬의 마지막에 쥰이 이런 대사를 한다. “나는 지금 내가 틀렸다거나 나빴다거나 라고 말하지 않아요. 나를 알아줄꺼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러자 우카이가 갑자기 카메라를 보면서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몰라줘도, 그래도 괜찮지 않습니까?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