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가고

우선 내 생각에 이 영화의 제목이 ‘태풍이 지나가고’ 보다는 ‘태풍이 몰아치던 밤’ 정도가 더 적당한게 아닌가 생각된다. 태풍이 지나가고 – 라는 제목은 영화를 결론 짓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인상이 강한데 이 영화의 핵심은 아무래도 태풍이 몰아치는 그 밤의 사건에 있기 때문이다.

부인과 이혼중인 료타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을 몰래 가져가 팔거나 어머니의 돈을 훔치는등 아직도 사회가 요구하는 남편이나 아버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부인과 이혼했음에도 부인 뒤를 따라다니며 어떤 남자를 만나고 다니나 시기하고 염탐한다. 돈은 한푼도 없고 밀린 가스나 수도세를 받으러 올까봐 숨어지내는 신세다. 어느 태풍이 몰아치는날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료타의 전부인 쿄고가 료타의 어머니 댁에 온다. 그 자리엔 료타, 그의 아들, 그리고 시어머니가 있다. 말하자면 여기는 료타의 세계. 집의 구조가 너무 좁아서 샷을 나누기에도 벅찬 구조다. 그래서 료타가 식탁에 앉아서 카레우동을 먹고 부인은 바닥에서 먹어도 둘은 한 프레임에 잡힌다. 가족이 모두 집에 모이자 료타는 기뻐서 들뜬 모습이 역력하다. 그래도 그 좁은 집에서 굳이 어떤 장면들은 카메라가 료타와 쿄코를 샷과 리버스 샷으로 배치해서 나눠버린다. 그 다음 자다말고 폭풍이 몰아치는 빗속을 뚫고 료타와 아들 싱고가 문어 놀이터를 찾아간다. 그곳은 어떤 아이가 사고를 당해서 출입금지가 된 곳이다. 사람은 입장이 금지된 곳. 거기에 료타와 싱고가 찾아간다. 그리고 어쩐일이지 부인이 그곳을 찾아온다. 들어오면 누구든지 한 프레임에 갇히고야 마는 세계. 집 보다 더 좁은 세계. 그래서 부인은 료타의 샷에서 빠져나갈수 없는 세계에 초대된 것이다. 마치 좁은 집에서 카메라가 료타와 쿄고를 나눠버리자 료타는 절대 카메라가 둘을 나눌수 없는 세계로 쿄교를 초대한것 이다. 그리고 그곳은 료타가 어린시절 비오는 날에 자주 가던 곳, 료타의 어린시절의 세계인 것이다.

흔히 이 영화를 료타가 태풍이 지나가고 개인 ‘어떤 날’ 처럼 또다시 미래를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 남자가 그 어떤 현실도 간섭할 수 없는 자신의 어린시절로 부인과 아들을 초대해 진심을 쏟아붙는 이야기라고 보았다. 그 다음 햇빛 내리는 현실의 세계에서 다시 뿔뿔이 헤어지는 영화. 료타와 쿄고가 헤어지고 만나고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료타는 자신의 세계에 싱고과 쿄고를 초대하고 보여준 것이 진심으로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지만 ‘태풍이 지나가고’는 관습적이고 익숙한 형식과 설정에 많은 부분 실망스럽다. 게다가’ 안녕, 내일의 나’ 이런 가사가 나오는 주제가는 왠지 견디기 힘든 나이가 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