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뤼미에르

요우코는 꿈을 꿨다. 고블린이 나타나서 아기를 훔쳐가고 얼음으로 만들어진 아이를 놓고간다. 아기의 언니 아이다는 아이가 다 녹은 후에 이걸 깨닫고 아이를 찾으러 간다. 엄마는 멍하니 있고 아빠는 집에 없는, 그래서 언니가 모든것을 맡아 해야 하는 outside over there의 동화속 이야기를 꿈꾼 것을 유코가 전화로 하지메에게 이야기 하며 영화가 시작한다. – 가베시광
요우코에겐 아버지와 새엄마가 있다. 생모는 자신이 네살 되던 해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 그리고 요우코는 대만에서 자신이 일본어를 가르치던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 자신을 버린 엄마 때문인지 그녀는 결혼은 안하지만 아이는 낳겠다고 한다. 엄마가 떠난 자리에 새로운 엄마가 자리하기 때문인지 아버지는 유코에게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대만 남자와 결혼 하지 않겠다는 이유도 간단하다. 그가 엄마와 너무 친한 마마보이라는 것. 그녀에게 영화에 없는 생모의 자리는 너무 크다. 어머니가 사라지자 아버지는 존재하지만 부재한다. 서구의 영화연구가들이 영화에서 아버지를 이야기 할 때 허우 샤오시엔은 아시아에서 어머니를 생각한다.
하지메는 오래된 서점을 가지고 있으며 요우코의 친한 친구다. 그는 지하철의 소리를 녹음하러 다닌다. 때때로 그는 유령처럼 요우코에게 나타난다. 그러면 유코는 꼭 잠을 자고 있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는 꿈속의 친구인지도 모른다. 하지메는 요우코와 코분야라는 60̃70년 전 음악가의 흔적을 찾는다. 또한 하지메는 자신을 전철의 자궁에 갇힌 아기로 표현하다. 다시말해 전철은 하지메에게 어머니와의 소통 같은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하지메는 부모가 있는지 없는 지 알수 없다. 단지 그는 오래된 고서의 향기 같은 사람이다.
‘카페 뤼미에르’를 가리켜 일상의 잔잔함을 보여준다는 사람들의 말은 대부분 잘못되었다. 이 영화의 모든 것들은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니까 오즈는 유머를 영화 속에 녹여놓고 대신 사람들을 프레임 안에 가둬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는 ‘동경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허우 샤오시엔은 오즈 탄생 백주년 영화를 만들며 쓸쓸하고 소음 가득한 동경이야기를 팬과 트레킹을 이용해 모두 움직이는 영화로 만들었다. 열차와 자동차와 거리의 사람들은 과도하게 의도적으로 끝없이 움직인다. 카메라는 움직이는 사람들과 차량 사이에 인물들을 갖다놓고 인물이 카메라에 포착되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움직이는 모든 것을 찍었다. 또한 프레임안에 반드시 한명만을 놓고 싶어하던 오즈와는 달리 허우 샤오시엔은 반드시 두명 이상을 함께 잡는다. 자. 오즈의 움직이지 못하는 그 숏트들을 움직이게 하는 방법은 뭘까? 해답은 간단하다. 그 숏트를 기차에 태우고 찍으면 되는 것이다. 인물과 카메라는 오즈의 기존영화들처럼 정지한채 있지만 열차가 움직이니까 그 숏트들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 다시말해 카페 뤼미에르는 그동안 갇혀있던 오즈를 움직이게 만들어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하는 영화다. 같은 자리에 있어도 인물들을 모두 숏과 리버스 숏으로 나누어 혼자처럼 보이게 찍던 오즈와는 정반대로 심지어 영화는 서로 다른 전철을 타고 있는 하지메와 요우코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연결시킨다. 영화에서 빛나는 장면중 하나인 하지메의 열차와 요우코의 열차가 스쳐지나가는 순간 핵심은 그들이 스친다는것에 있는것이 아니라 한 프레임 안에 들어있게 찍었다는 사실이다.
인물들이 정지하거나 배경이 정지되면 반드시 소리를 집어넣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소리라고 할만큼 많은 비중을 두었다. 예를 들어 요코가 사진찍는 모습이 보이고 찍히는 그 대상까지 카메라가 이동하는 데드타임에 열차의 소리나 자동차의 소리를 넣는다. 다시말해 카페 뤼미에르에서 모든 것을 소통시키는 것은 소리다. 누군가 전화를 걸면 반드시 열차나 사람이나 소리나 무언가가 움직이거나 시작된다. 이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공백을 메꿔주는 사운드다. 오즈가 그의 특기인 사운드(대사)를 통해서 숏을 나눈 반면에 허우샤오시엔 이 시퀀스에서에서 다음 시퀀스로 넘어가는데 (예를 들어 닷카페를 찾는 길에서 나오는 음악이 아무 상관없는 다음 씨퀀스인 요우코의 방에서도 계속 나온다) 전의 씬에서 흐르던 음악이 계속 된다. 이렇게 영화를 만들면 영화는 일관성이 깨져 버린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게 만들었다. 오즈가 사운드로 숏을 나누었던 반대로 사운드로 숏트들을 모두 연결시키려 하고 있다. 좀 더 과도한 해석을 해보자. 요우코는 오즈의 ‘동경이야기’에서 남편을 잃었으나 시부모에게 정성을 다하는 며느리다. 왜냐하면 동경이야기에서 시아버지가 어머니의 유품으로 며느리에게 준 시계를 요우코가 가지고 있다. 그녀가 시계를 보는 장면에서 전차의 시계와 그녀의 시계의 시간이 다르다. 말하자면 이건 오즈영화의 시간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우코 (며느리)는 그것을 하지메에게 선물로 준다. 116주년 기념이라고 한다. 대부분 알듯이 100년은 오즈탄생이고 16은 허우샤오시엔의 16번째 영화를 뜻한다. 하지메는 말하지면 오즈의 시간을 이어받은 허우 샤오시엔이 된다. 그래서 그가 플랫폼에서 녹음하는 소리는 바로 우리가 영화에서 듣는 배경음이 된다. ‘카페뤼미에르’의 소리들은 동시녹음이 아니라 따로 입혀졌다. 같은말로 영화속의 사운드는 하지메의 녹음소리다. 그래서 요우코와 하지메의 만남은 불현듯 시간을 통과해 서로에게 나타나는 오즈와 허우 샤오시엔 처럼 보인다. 요우코는 죽은 오즈처럼 잠을 자고 하지메는 오즈는 깨운다. 또는 하지메가 마지막 장면에 녹음을 하면서 요우코를 알아보지 못한다. 서로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 있지만 하나로 묶는 프레임과 사운드처럼 카페 뤼미에르안의 오즈와 허우샤오시에은 서로를 바라보며 존재한다.
‘카페 뤼미에르’가 오즈의 숏트들을 필사적으로 움직이게 하려고 이용하는 또는 행복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열차다. 정말 중요한것! 오즈의 동경이야기에는 열차가 나오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누구에겐가로 향하기 위한 이동수단으로 열차에 탄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노부부가 어딘가로 여행할때 출발지가 나오고 컷이 바뀌면 도착지다. 사실은 그들은 아무데도 가지 못하는것이다. 단 한번 동경의 풍경을 보여주기 위한 전차는 나온다. 그것은 누구에겐가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단 마지막에 유품으로 시계를 받은 며느리가 열차를 탄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이 장면도 창밖은 보여주지 않아 정지된 것 처럼 보인다. 그리고 ‘카페 뤼미에르’는 그 열차의 도착으로 시작한다. 다시말해 영화는 오즈의 ‘동경이야기’에서 빠져있던 것들을 채우는 작업이다. 노부부가 탈 수 없었던 열차를 등장시켜 영화내내 움직이는 사람들과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은 보여준다. 절단되었던 숏트들은 롱테이크로 이어지고 사운드로 이어지고 마치 오즈처럼 결혼을 안하기로 한 소녀는 그 외로움 조차도 인생을 빛나게 한다고 이야기한다. 영화는 오즈가 이야기하던, 인간이 태어나 살아내야만 하는 쓸쓸함 마져 아끼겠다는 요우코의 노래로 끝난다. 그녀의 노래가 시작되는건 정확이 네대의 열차가 겹쳐지는 순간이고 그 순간 허우샤오시엔과 우리는 오즈가 이제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카페 뤼미에르’는 오즈가 행복하길 바라는, 그래서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동경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