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아게를 먹고 앤젤스 셰어를 보고 테이크 쉘터에 대해 쓰다

콜레스테롤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제일 먹고 싶었던 카라아게를 드디어 먹었다. 왜 그렇게 금지된 음식은 상상속에서 황홀한지 모르겠다. 심야식당 시즌 2의 2화 –  해주는대로 안먹으면 한대 맞을것 같은 주인장 아저씨의 카라아게를 턱을 괴고 침을 넘기며 몇번을 봤는지 모른다. 그러나 드디어 먹은 카라아게는 단지 카라아게일뿐. 하하. 승권이가 먹더니 “그냥 닭튀김인데요?” 란다. 그냥 닭튀김이라니! “카라아게는 다리살로만 만들고 튀김옷을 녹말로 만들고 간장을 베이스로 한 닭튀김 입니다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실은 그냥 닭튀김이다. 며칠전에 남균형이랑 먹은 댓짱 돈까스가 훨씬 맛있었다. 비싸기는 또, 게다가 주차딱지까지 끊었음. ㅜㅜ

근래에 본 영화들 중 최고의 영화는 테이크 쉘터 였다. 이 영화의 몰입도와 영화가 갖는 파워가 압도적이었다. 압도적인 파워는 항상 조용함에서 나온다. 무언가 폭발할 것 같은 숨죽임. 여기저기에 그런 긴장감이 가득하다.

(스포있음) 커티스는 어느날 부터 나쁜 꿈을 꾼다. 꿈에서 개에게 물리고 그 아픈증상이 현실에서도 계속된다. 누군가 자기 딸을 자꾸만 납치하고 자신이 구타당한다. 그리고 꿈을 깨면 폭풍우를 보고 천둥소리를 듣는다. 새떼의 무리가 이동한다. 그래서 그는 폭풍우에 대비에 모든 재산을 담보로 걸고 대출을 받아 방공호를 짓기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는 커티스의 이런 증상이 정신병적 망상에서 시작된다는 거다.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들어간 그 나이에 커티스도 이런 증상이 시작된것이고 신경정신과 최고의 권위자는 그를 입원치료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마음을 정리하고 입원치료를 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 전에 가족은 해변으로 잠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실제로 거대한 허리케인과 마주하며 영화가 끝난다.

이 영화를 해석하는 평론가와 리뷰어들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커티스의 증상이 정신병이 아니고 실제 예언의 징후로 읽는다. 그래서 커티스가 방공호를 만드는 것을  노아의 방주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때 리뷰어들은 커티스의 입장에서 영화를 풀어가고 있으며 태풍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읽어가면  영화는 반전을 보여주기 위해서 정신병을 끌어들인다음 관객을 속이기 위해 어머니까지 정신병으로 만들어 놓는 비겁한 영화가 된다. 게다가 커티스 눈에만 보이는 이상한 징후들과 소리들은 관객을 속이기 위한 장치가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면 나쁜 영화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커티스는 실제 정신병적 징후가 시작된 것이지만 그의 불안증은 당시 미국사회를 강타한 경제위기를 바라보는 개인의 불안을 그려냈다는 것이다. 폭풍이 지나간 뒤에도 방공호안에서 방독면을 쓰고 밖으로 나오기를 두려워하는 커티스의 장면들은 두말 할 필요 없이 그것을 증명하고 실제 감독도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할때 우리는 마지막 해변씨퀀스에 당혹할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영화속 모든 자연의 위협이 커티스의 불안을 상징하는 망상이었다면 대체 마직막 여행지에서 커티스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실제로 목격하게 되는 거대한 허리케인과 기름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두번째 해석을 하는 리뷰어들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해석하지 못했다. 심지어 예민하게 장면을 복기하는 신형철도 씨네21에서 마지막 장면을 커티스의 망상이라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커티스의 망상이 되려면 영화의 마지막씬- 아내가 처음 구름을 발견하고 기름비를 만지는 장면을 커티스의 시선으로 찍어야 한다.

그러나 아내가 처음 폭풍구름을 바라볼때 커티스는 아내 앞에서 폭풍의 전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장면이 커티스의 망상이란것은 설명이 안된다. 그 다음 아내가 손으로 기름비를 만지는 장면도 명백히 카메라는 아내의 시선으로 찍었다. 단, 마지막에 아내가 구름을 바라볼때 커티스가 아내의 등뒤에 서 있는데 이 장면만은 구름을 바라보는 아내를 다시 커티스가 바라보는 것으로 찍었다. 그래서 커티스의 망상이 가능한 숏트가 된다.

하지만 오히려 이 장면은 영화 시작에서 커티스가 바라본 구름의 구도를 그대로 가져와 아내가 바라보게 하는 구도로 보는것이 맞지 않을까? 첫 장면의 커티스와 마지막 장면의 사만다는 지금 동일한 경험을 마주하고 있는것이다. 게다가 이 장면에서 커티스가 아내뒤에 있는 이유는 아내를 안전한 곳으로 불러들이는 역활을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이 씬이 커티스의 망상이라는것은 명백하게 오류라고 나는 생각한다. 음악이 화성(의 진행)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하듯이 영화는 결국 쇼트와 씬이 그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대신, 영화 첫번째 씬- 커티스가 구름을 바라보고 기름비를 만지를 장면을 커티스의 꿈이라 하고, 영화 마지막 씬- 아내가 폭풍을 보고 기름비를 만지는 장면도 커티스의 꿈으로 한 후 이 두 씨퀀스를 마주하게 하면 신형철의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커티스와 딸이 해변에 모래집을 지을때 카메라는 갑자기 집 안에서 아내의 요리장면을 찍는다. 그리고 다시 커티스와 아이가 모래집을 짓고, 짓자마자  폭풍우를 발견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게 꿈이라면 중간에 집안에서 요리하는 씬은 당연하게 빠져야 한다. 왜냐하면 요리씬은 요리라는 하나의 행위를 두 쇼트로 나눠놓은 다음 첫번째 쇼트는 아내의 가슴위치에 카메라를 놓았다. 그 다음 이어지는 요리쇼트에서는 카메라의 높이가 높아진다. 이 씬은 어떤 설명을 해도 한 사람의 시선이라는 성립이 안된다. 더우기 커티스는 그런 각도에서는 바라볼수가 없다. 이것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관객에게 ‘지금 이 사람들은 일상의 평안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라는 객관적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넣은 장면이다. 게다가 마지막 해변 씨퀀스를 제외하면 영화속의 다른 꿈들은 주체가 커티스이고 모두 커티스의 시선으로 되어있다. 혹은 3인칭 쇼트. 그러나 문제의 마지막 해변가 씬에선 커티스가 아니라 아내의 쇼트들이 주제가 된다.

나는 두번째 해석 – 경제위기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개인의 불안-에 동의하지만 그의 불안을 반대편에서 바라본다.  거대한 폭풍구름과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새의 무리가 커티스의 정신병적 증상이 아니고 그 반대로 그 폭풍구름과 새떼들 때문에 그의 정신병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커티스의 불안을 낳는 폭풍과 새떼를 미국 자본주의 아래의 어두운 복지현실(귀가 안들리는 딸의 수술과 불안증을 치료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그의 암울한 의료현실)의 메타포로 읽어야 영화의 마지막 씬이 해결된다. 영화에서 인물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것은 직장을 잃어버린것이 아니라 직장을 잃어 의료보험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마지막 그 거대한 자본주의의 폭풍우는 커티스의 가족은 물론이고 미국 사회 모두를 정신병자로 만들것이라는 경고이다. 커티스의 정신병적 불안은 곧 당신의 불안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폭풍우를 만나는 씬은 영화의 주체였던 커티스를 객체의 자리로 뒤집어 놓고 파멸의 레퀴엠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우리를 구원할수 있을까? 그것이 비단 미국사회뿐일 것일까? 이 질문에서 자살국가 1위의 한국을 떠올리는건 한국사람으로써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레오스 까락스의 [홀리모터스]와 위 사진을 찍으며 보았던 켄로치의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를 묶어서 쓰려고 했지만 자꾸만 글을 길어지고 몸이 천근만근이 관계로 다음으로 미뤄야 할 듯 싶다. 홀리모터스는 보고 난 후에 정말 궁금한게 많아서 많이 자료를 찾아보다 결국엔 2008년 옴니버스 영화 [도쿄]까지 보았고 랭보까지 나가야했다. 좋은 영화임엔 틀림없으나 그 영화가 위대하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선 그 영화의 위대함을 발견할수 없었다. 대체 뭐가 위대하다는 건지 나를 설득해주길 바랬으나 아직 그런 글은 없었다. 하지만 난 이 영화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다.

켄로치의 앤젤스 셰어는  그냥 켄로치의 영화였다. 그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영원한 투쟁은 영화가 비록 코믹해져도 변치 않았다. 아아, 도둑질도 응원하는 켄로치여!! 난 이렇게 변치 않는 사람이 좋다. 왜냐하면 실은 내가 변할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아니면 모두가 변했다고 느끼고 있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