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오늘 아카데미 시상식 발표가 있었는데 문라이트가 작품상을 탄 것은 살짝 신선한 충격이었다. 문라이트는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 지루하고 상투적인 영화였지만 그래도 흑인게이가 정체성을 찾아가는 영화에 그랑프리를 주는것은 아카데미가 이렇게 변했구나, 혹은 내가 아카데미가 변한걸 눈치못챌 만큼 늙었구나 같은 생각들이 스쳤다. 게다가 이 영화는 인류구원이나 화해의 거창한 메세지도 아닌데 오스카상을 받다니 말이다.

반면 며칠전 프랑스 세자르 영화제에서 폴 버호벤의 엘르가 그랑프리를 거머쥔 것을 보고도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데 세자르영화제의 영화예술에 대한 깊은 사유가 부러웠기 때문이다. 엘르의 그랑프리는 뭐랄까 마치 1960년에 김기영 감독의 하녀가 당시에 대종상 대상을 받은것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물론 당시엔 대종상이 없었다) 나는 엘르가 어마어마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내가 본 엘르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다른얼굴.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불가능한 욕망이 어떻게 환타지를 재생산 해내는가에 대한 영화라면 엘르는 불가능한 욕망이 현실에서 가능하게 될때 그 환타지는 무차별 폭력성을 갖고 현실에 도착한다 -는 이야기로 읽었다. 문라이트의 수상을 보면서 내가 떠올린것은 리틀이라고 불리던 소년의 침묵이었다. 그리고 소년이 침묵을 깨고 “내 이름은 샤일록이에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 이후의 이야기는 그 순간을 설명하고 부연하는 것들뿐이다.

침묵하니 단순하게 막 떠오르는 단어들 – 니체와 비트겐슈타인,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페르소나,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침묵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실렌시오(침묵) 극장, 작년에 본 영화 자백, 그리고 박근혜(?).

저마다 세상의 폭력에 마주하기 위해 침묵하거나, 자신의 감당할수 없는 어둠의 심연을 깨달았거나,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데 그 진실이 증명될수 없어 침묵하거나, 말이라는 의미 한계때문에 침묵을 선택하거나, 말하면 깨지는 관계들이거나, 혹은 어두운 진실 그 자체이거나 침묵의 이유들은 제각각 일 것이다. 그렇지만 침묵은 그것이 의미로 가득한 무의미라는 점에서 거대한 텍스트로 다가온다.

모두가 궁금해했던 박근혜의 세월호 7시간. 그녀가 그것을 침묵하자 온갖 매스컴들이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이 싸움에선 침묵하는 자가 이길수 밖에 없는 대결이다. 그러자 현실은 그녀의 침묵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박근혜의 침묵이 계속되자 그것은 대통령 탄핵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그 침묵의  크기만큼 현실은 그녀에게 커다란 압박을 선물했다. 또한 그녀의 침묵이 계속될수록 그녀를 대신해서 등장하는 애국보수 태극기 집회의 발언들. 박근혜와 시대와 나이를 공유하는 세대가 나와서 마치 그녀의 페르소나처럼 내란이니 피로 물드느니 무시무시한 발언을 할때마다 우리는 탄핵반대집회 사람들의 말을 그녀의 마음으로 그것을 읽어내며 그 가면 뒤에 숨어 있는 그녀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침묵할수록 드러나는 속내앞에서 박근헤의 7시간은 이제 역활을 다하고 점점 맥거핀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제 그녀의 탄핵결정에 7시간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는것을 안다. 무엇을 했건 그녀가 아이들의 죽음 앞에서 필사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오직 그녀만이 끝내 그 7시간을 지켜내고자 인간으로서 체면도 품위도 다 내팽개치는 모습이 어이없을 뿐이다.

그리고 쓰다보니 어쩌다 나는 이밤에 영화이야기를 하려고 앉았다가 정치이야기로 흐를수 밖에 없는 시대에 살게 되었을까 슬프기만 하다. 방금전에도 어머니께서 친구분이 애국TV 보고 있다고 톡이왔는데 애국TV가 어디냐고 여쭤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