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이야기

영화가 갖고 있는 영화고유의 경험을 한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블로거와 유투버의 대중평론이 중심에 서기 시작하면서 영화적 경험을 위한 비평들은 꼰대와 먹물이라는 이름으로 추방되고 삶의 존재를 위로해주던 영화들은 점점 더 숨어버렸다. 영화가 숨으니 좋은 평론 또한 대중의 곁을 떠나갔다. 새로운 배움은 어디에 있는가? 영화에서 배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 비평이 필요없는 시대. 나는 찾을 수 없는 술래잡기의 술래다.

매불쇼에서는 어느 요일에 유투버이지 리뷰어인지 하여간 게스트가 나와서 전찬일을과 영화에 관한 논쟁을 한다. 나는 전찬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십 수년전 그가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를 두고 정성일과 설전을 벌일 때 저런 사람도 영화평론을 하는구나, 어이가 없었다. 당시에 그는 엘리펀트를 괜히 있어보이게 만든 영화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 매불쇼에서 전찬일은 당시의 정성일을 넘어서는 위대한 역활을 맡고있다. 트뤼포가 누군지, 누벨바그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한다. 전찬일은 청취율 1위의 팟캐스트 방송에 나와서 어벤져스가 최고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늘도 굳굳하게 닐 조던을 이야기 한다. 일기와 비평의 대결. 일기는 공감되고 비평은 웃음거리다. 하기야 뉴스공장에서 영화이야기를 할때면.. 그 프로에서 예술은 현실속 괄호의 세계다. 가끔 괄호가 벗겨질때도 있기는 하다. 정치적 도구로 사용될때다. 두 방송다 영화나 음악이야기가 시작되면 듣다가 꺼버린다.

2년간 극장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내가 다시 극장을 들어서는 첫번째 영화는 메모리아가 될것이라고 생각했다. 칸에서도 수상을 응원하면서 당시에 라이브로 보았다. 하지만 언제 국내에 들어올지 기약이 없다. 아핏차퐁의 영화는 항상 나에게 영화적 경험의 기적같은 위로를 준다. 흔히 영화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하지만 아핏차퐁의 영화에서는 세상이 영화를 비춘다. 정글이 스크린이고 대지는 사운드다. 그 깊은 울림. 영화에서 사운드는 왜 필요합니까? 다른영화들이 극적인 효과로 사운드를 활용할때 아핏차퐁에게 사운드는 역사라는 심연의 울림. 인간의 껍데기를 두들기는 존재의 파장. 그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세계의 사물들이 구조가 된다. 카메라의 섬세한 시선은 오브제라는 계급을 부서버리고 그자리에 자연을 가져다 둔다. 가장 플로레타리아적인 예술 – 자연.

하여간 나는 무언가를 찾고 싶었다. 배움을 충족하고자 오늘 문준용의 별을 쫒는 그림자들 작품전에 다녀왔다. 우연히 유투브로 볼때 신선했다. 기존 미술작품들이 관객이 대상을 응시하는 것이라면 별을쫒는 그림자는 그림자들이 관객을 응시하고 부른다는 그 역전이 흥미로왔다. 그 다음 그림자들이 벽에 문을 만들어 그 안으로 사라지는 장면이 벽이라는 사물에 관한 어떤 상상과 배움이 있을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관람을 하니 작품보다는 문준용 얼굴이 더 훌륭했다. 기술적으로는 진보했을지 모르지만 새로운 사유대신 새로운 경험만 있었다. 유행어를 가져와 예술과 메타버스의 시작점이라고 애써 정의해보려하는 나 자신에게 웃음이 났다. 대신 그 그림자들의 주인들은 저토록 해맑은 그림자를 남겨놓고 스스로는 왜 존재하지 않는 걸까 생각했다. 혹시 세월호 아이들의 그림자는 아닐까. 그래서 배를 타고 하늘로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올해 나는 두개의 영화에서 스스로를 반성했다. 하나는 레드 리 감독의 레미제라블. 영화의 라스트 씬- 그 화염병을 든 소년의 눈동자를 보며 라스트 1분을 제외한 나머지. 즉 영화를, 윤리를, 타인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던 나의 모든 부분을 다 반성했다. 다른 하나는 바쿠라우. 저 엉망진창 카메라의 상상선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 영화를 보면서 계속 저 따위로 만들어도 되나? 를 계속 되내이던 내 자신이 마지막에 무너져내렸다. 와 이렇게 만들어도 이게 가슴을 울리는구나. 정교한 구도나 영화적 문법, 쇼트와 미장센, 그토록 좋은 영화의 기본이라고 믿던것들을 다 날려 버려도 괜찮구나.

올 해 가장 좋았던 영화는 홍상수의 도망친여자와 구로자와 기요시의 스파이의 아내다. 지금 당장은 그 두가지가 떠오른다. 도망친 여자는 새로운 홍상수의 세계다. 대화의 영화. 말이 주는 감동. 스파이의 아내는 내가 생각하는 올해 본 가장 영화다움을 충족시키는 영화. 영화자체도 좋지만 구조의 반전이 주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각본도 정말 좋다. 거기에 히스테릭한 구로자와가 더해지니 영화를 보는 내내 이상하게 신이 났다. 서스펜스를 표방하는데 생각할수록 웃긴다. 뭐랄까. 트로트의 선율에 랩의 가사를 붙였다고 비유하면 될까. 쓰면서 생각났는데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포제서도 더하고 싶다.

반면 올해 가장 실망스런 영화는 그린나이트. 딱 잘라서 난 소설의 서사구조를 따라가는 영화를 영화고유의 예술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두번째로 영화의 느린 호흡이란 결국 현실의 시간을 담기 위해서인데 환타지장르에서 현실의 느린 시간을 가져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 오히려 이 영화 때문에 데이빗 로워리의 전작 고스트 스토리도 내가 과장해서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돌아보게 되었다. 셋째 감독 스스로도 책임질 수 없는 모호함을 관객에게 전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 모호함의 비밀을 풀어내고자 여기저기서 의미를 찾아내고 덧붙이는 이 숨은그림찾기의 결말은 없다. 결말이 없어서 평론가들이 믿는 결말. 아마도 그린나이트는 주인공의 목을 잘랐을것이다. 모두들 그렇다고 생각하고 이 영화를 평가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목을 자르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 다른 가설. 반대로 그 깨달음이 가상해서 주인공을 놓아주었다면 이 영화는 그래도 걸작인가? 그린나이트가 주인공을 보내는 순간 이 영화가 얼마나 상투적이 되는가. 내가 생각하는 열린결말은 이런 저런 결론을 내에도 구조에 영향을 주지 않아애 한다. 사유만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잃어버린도시Z의 결말. 퍼시포냇은 죽어도 살아도 영화자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린나이트는 그렇지 않다. 목을 내주러 가는 기사의 여정이거나 그린나이트와 싸우러가는 기사의 여정, 그것이 이 서사의 중심에 있다. 여우가 어떤 의미고 벨트가 어떠 의미고 교환이 어떻고 뻔한 의미들을 찾는것은 표피에 불과하다. 숨은그림찾기가 루브르에 전시되는가?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마지막을 감독이 책임져야 하다는게 내 생각이다. 영화는 관객과 감독이 평등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도 생각해보아라 하는 가르침은 필요없다. 영화를 왜 보러 가십니까? 감독의 퀴즈가 아니라 그의 세계를 만나기 위해.

올해가 가기전에 메모리아와 드라이브 마이카가 개봉하면 좋겠다. 내년에는 로버트 패티슨이 연기하는 더 배트맨도 기대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가장 조커같은 배트맨을 상상한다. 배트맨아 이제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만들어놓은 그 육중한 무게의 리얼리즘을 벗어버리고 스스로 조커보다 더 조커인 너를 증명해라. 트레일러를 보면서 이런 바램을 생각해봤다.

별을 쫒는 그림자들 전시회를 갖다가 승권이가 형 애플워치 사줄께요. 보러가요, 그래서 애플워치를 선물받았다,

사실은 이 선물받은 날을 남기려고 글을 쓴다. 글을 쓰다보면 늘 그렇듯 채워지지 않은 투덜거림이 되지만 그래도 썪은 자본주의에서 피어난 애플의 디자인은 아름답다는거. 그러니 애플로 쌓아올린 우정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암. 이정도는 남겨놔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