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베를린에 들어있는 어떤 징후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공격할때 항상 하는 말 중 하나가 사회주의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사이에서 빚어내는 계급의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스스로 지도층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권력의 새로운 계급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회주의가 사라져가는 동안 자본주의는 글로벌이라는 새로운 생태안에서 더욱 당당하고 뻔뻔하게 부르주아와 플로레타리아의 계급을 더욱 확장시켜 미국의 재편이라는 거대한 계급을 만들었다.

미국은 최상위층에서 유럽과 소위 선진 아시아를 아래에 두고 그 밑으로 제3세계의 노동을 착취하는 피라밋을 완성시켰다. 그 피라밋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미국은 항상 정의로와야 한다. 안 그러면 아래로 부터의 투쟁에 그 계급구조는 와해되고 말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정의로움을 증명하고자 스스로 전쟁을 만들어낸다. 냉전이 끝나고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적은 아랍이다. 그는 그 외에도 많은 국가들이 불의의 대상에 포진된다. 북한도 그렇다.

한국은 아직도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끝나지 않은 이상한 지형이다. 왜냐하면 냉전으로 권력을 잡은 권력가들이 그 권력을 유지하려면 계속 냉전상태의 유지가 간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거가 끝나고 우리는 아직 남북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수 없음이 증명되었다. 젊은 층에겐 냉전보다 신자유주의라는 더 악날한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지만 장노년 층에게는 북이야 말로  거대한 트라우마다. 그래서 우리가 영화에서 남과 북을 다룰때 남과 북의 문제는 아직도 꽤나 중요하다.

류승완 감독은 남과 북이라는 – 이야기만 들어서는 왠지 시리와 비슷할것만 같은, 소재를 가지고 베를린으로 갔다. 왜 베를린이냐 하면 거기에 동서의 이데올로기의 흔적에 남북의 이데올로기의 병치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니 베를린으로 간건 그냥 멋있어서다. 만일 베를린이라는 장소가 제목에 쓸만큼 상징적인 것이었다면 라스트 씬에서 황량한 밀밭으로 옮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밀밭은 나라와 장소를 상징하는것이 아닌 탈 이데올로기적 장소이다. 이말은 결국 영화 베를린은 남과 북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직 적을 물리치기만 하면 되는 장소. 그 적은 누구여도 상관없는 지형이다. 생각해보자. 영화속 전라도 광주에서 누군가 죽는다는건 아직도 의미깊은 일이다. 혹은 봉하마을에서 아니면 청계천에서 장소는 언제나 그 스스로의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의 한국인에게 밀밭은 그런 상징을 지워버리는 장소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오직 이기면 되는 것이다. 하기야 그건 어쩌면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많은 한국 젊은이들의 냉전에 관한 생각일 수도 있다. 그래서 베를린이라는 제목은 ‘나는 영화를 있어보이게 찍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다’의 줄임말로 보일지경이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에서 그저 작은 문제일 뿐이다. 나도 종종 뭔가 있어보이고 싶어하는건 사실이니까.

미국이 항상 자신의 정의를 증명하고자 새로운 적들을 만들어 전쟁을 하때 그 적들은 언제나 영화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아랍은 예전부터 였지만 북한은 20세기를 넘어가면서 더욱 핫한 대상으로 영화에 종종 등장했다.우리에게 북한은 공식적으로 주적의 대상이지만 미국에게 북한은 그저 적대해야할 여러 국가중 하나일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화에서 북한을 다루는 방식과 미국이 북한을 다루는 방식은 당연하게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그런데 영화 베를린은 남과 북을 대치시킨다음 독일의 동과 서 대신 이상하게 아랍과 이스라엘을 병치시켰다. 그런 다음에 이 네나라의 관계를 밀밭이라는 탈 이데올로기적인 장소로 옮긴다. 그리고 버림받은 첩보원과 그의 전향을 바라는 국가정보원이 네 나라의 얽히고 섥힌 관계를 해결한다. 여기서 나는 2013년 한국영화가 왜 아랍을 북한과 짝패로 만들어놓고 그들을 소탕하는가 의문을 가질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다분히 한국적인 시각이 아니라 미국적인 시각이기 때문이다. 과연 2013년의 대한민국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문제를 스크린에 끌어다 놓고 그것을 총으로 해결할수 있는 나라인가? 그리고 남과 북의 문제를 아랍과 이스라엘의 문제와 나란하게 배열해놓고 바라볼수 있는 나라인가?

베를린은 이상하게 헐리웃 영화의 모방을 넘어서서 서양인의 시각과 사고로 이루어진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우리가 미국을 열망하고 쫒는동안 우리의 사고도 이미 그들을 닮아가는 것일까? 외국인 학교를 다니는 초등학생이 마치 스스로를 백인이라 생각하며 다른 한국아이와 차별된 우월성을 느끼는 것처럼 현실은 이미 우리의 사고까지 종속된 것은 아닌지 섬뜩하기만 하다. 베를린이 헐리웃 영화처럼 만들었다고 이 영화를 칭찬하는 이들에게 헐리웃 영화처럼 만드는 것이 결국 그 문화와 사고를 닮아가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왜 환영할만한 일인지 나는 묻고 싶다. 이것은 오히려 너무나 슬픈 징후이다. 영화가 현실의 거울이라고 혹은 자신의 거울이라고 1970년대 기호학자들이 말했건 것처럼 영화의 쇼트를 따라만드는것, 영화의 가장 기본단위. 그것은 어쩌면 당신의 사고의 기본단위가 될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것을 치루면서 영화 베를린을 해석해는 가장 즐거운 방법은 이 영화를 한국의 국정원의 욕망으로 읽는것이다. 영화속에서 북 공작원들을 처단하고 마치 헐리웃 액션영화속에 활약하는 비밀첩보원이라도 된냥 멋진 정의의 삶은 살지만 현실은 ‘오늘의 유머’싸이트에가서 댓글이나 다는 것. 그것이 오늘날 한국 국정원의 현실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 삶을 벗어나고자 하는 환상으로 읽어내려가는것이 영화 베를린을 보는 유일한 위안꺼리가 될 것이다. 그렇게 읽지 않으면 견딜수 없는 시대. 각종 포털과 비평은 지금 그 쓸쓸한 시대를 영화에서 목격하고는 기뻐하며 별 넷을 주며 마중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