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목소리

알렉산더 소쿠로프 감독의 1995년작 영혼의 목소리는 5시간 30분짜리 다큐멘터리다. 나는 요즘 동시대의 영화에 거의 흥미를 잃었다. 그래서 오즈의 dvd 30편을 하나씩 꺼내 보고 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접하게 된 소쿠로프의 영혼의 목소리는 나를 격한 감정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일단 나는 5시간 30분의 5개의 파트중 3편까지 보았다. 그리고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받은 감정의 정서는 생애를 통털어 몇 안되는 경험이었다. 영화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런 기호도 상징도 없고 영화의 형식을 논할만한 테크닉도 없고 이미지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도 없다. 카메라가 그 텅빈 풍경을 바라보니 카메라에 그냥 그 풍경이 담겼다. 그 뿐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30분동안 롱테이크로 러시아의 어느 풍경이 보인다. 영화는 계속 이 장면에 고정되어 있다. 이게 대체 영화가 시작된건지 아닌지 멈춘건지 알수가 없다. 그러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이 나오면서 나래이션이 시작된다. 이야기가 아니라 음악이 영화를 끌어가니 이미지는 하나여도 상관없어 보인다. 그 다음 메시앙이 나오고 다시 모차르트 23번 피아노 협주곡이 나오고 28분경부터 베토벤의 교향곡 7번 2악장이 나온다. 물론 롱테이크가 가져다 주는 마법들이 여기서도 일어난다. 카메라는 그냥 텅빈 풍경을 바라보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풍경들은 시간으로 채워지기 시작하고 아름다움으로 가득하게 된다.

소쿠로프는 여기서 음악의 아름다움을 논하면서 삶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그러다가 희미한 그림자가 오버랩 되면서 한 군인 청년이 자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편집의 순서대로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까지 본 것은 청년의 꿈일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전쟁터에서 잠을 자면서 고향 러시아를 그리워 하는 꿈. 거기서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메시앙을 듣는다. 그러나 다른쪽으론 눈과 얼음으로 가득한 삶의 고통의 풍경이 소쿠로프를 사막의 청년에게 이끌리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상하게 꿈는 꾸는 청년은 자면서 우는것 처럼 보인다.

다시 화면이 바뀌고 사진의 풍경이 계속되다가 청년은 자면서 재채기를 한번 하고 영화는 끝난다. 눈뜨면 청년은 사막의 전쟁터에 있을 것이다. 이 현실로의 귀환 같은 재채기는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리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담은 텅 빈 이미지의 영화는 이상하게 숭고함과 떨림으로 가득하다. 영화는 그렇게 1부를 끝맺고 사막으로 향한다. 나는 이 37분의 영화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