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리카의 이상한 사례

무려 102살에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 감독이 만든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례는 영화의 회화적 전통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얼마나 찬란한가를 보여주는 가슴 뭉클한 경험이다. 올해 본 소쿠로프의 영화들 또한 회화적 전통에 있긴 하다. 하지만 소쿠로프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풍경을 가지고 와서 거울에 비춘 후 그 이상하게 일그러진 거울의 풍경을 통해 내면의 슬픔의 실재를 찍었다. 주인공들은 죽음이라는 비극앞에서 망연자실한다.

반면 올리베이라 감독의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례는 바로크 회화의 전통에서 주인공이 꿈을 꿀때 갑자기 샤갈로 점프한다. 그 다음 죽음이 갑자기 찾아온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죽음은 이상하게 행복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구원의 도구처럼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102세 감독이 생각하는 죽음의 정의. 말하자면 죽음은 생의 마지막 선물이다.

사진작가 이작은 안젤리카라는 죽은 여인의 초상화를 찍게된다. 그녀는 결혼 얼마 후 죽게되었는데 그녀의 모습이 여전히 아름답고 안타까워서 유족들이 사진으로 남겨두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사진을 찍는 순간 안젤리카가 느닷없이 눈을 뜨고 이작을 향해 웃는다. 이작은 정신을 차렸지만 그날부터 혼자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는 영화의 마지막.이작이 꿈을 꾸는데 방안에 새가 날아든다. 그리고 안젤리카가 찾아온다. 그리고 다음날 꿈에서 깨어나 새장속의 새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죽어있는 안젤리카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장면이 있다. 처음 안젤리카가 꿈에 나타나서 이작과 함께 마을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장면. 그것은 그야말로 영화라는 마술. CG의 눈속임이 아니라 조르쥬 멜리에르가 우리에게 선물했던 그 기이하고 아름다운 환영처럼 그 장면을 찍었다. 게다가 그 씨퀀스는 의도적으로 샤갈의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만들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나의 넋이 나가기 시작한 것은 그 꿈의 장면이 아니라 이작이 달리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샤갈- 그러니까 초현실주의와 낭만주의의 꿈에서 시작해서 바로크 회화의 방을 지나 과거로 달리기 시작한다. 이제는 달릴수 없는 육체를 가진 감독이 필사적으로 달리는 장면을 찍는다. 그리고 안젤리카를 향해 달리면서 이작은 도시를 지나고 시골을 지나 르네상스 회화 속으로 달려가서 그 소실점 안에서 소멸한다. 그 소멸하는 순간에 유머와 어떤 경이로움을 통한 깨달음이 있다. 그야말로 대~박!

20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달리기가 압바스 키아로스마미의 ‘지그재그 삼부작’이었다면 21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달리기는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례’일 것이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이작. 그는 회화의 역사를 관통한 후 안젤리카를 만난다. 그리고 의사가 그를 살리려 일으키려고 하자 의사를 밀어버리고 안젤리카에게 가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이 영화의 이야기가 이작이 안젤리카를 그리워하다가 사랑때문에 죽었다는 것은 영화의 잘못된 해석이다. 오히려 영화는 이미 죽음이 놓여진 이작 앞에 행복한 죽음으로 인도하는 안젤리나가 찾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작은 이미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고, 자신의 무덤을 파는 농부들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고, 그 장소에 가서 쓰러지는 것이고, 영화 맨 처음에 ‘방황하는 영혼을 천사(안젤리카 – 라틴어로 천사)가 인도한다’는 싯귀를 읽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안에서 102세 감독앞에 있는 죽음, 그  주어진 운명을 아름다운 구원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여기서 다시 환기되는 브레송의 영화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의 마지막 글귀 – ‘모든 것은 은총이다’ 브레송의 거의 이 지점에서 모든 영화를 시작한 후 점차 절망해가지만 올리베이라는 반대로 이것으로 결론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