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의 노래

알베르 세라의 새들의 노래는 동방박사 3명이 아기예수께 경배를 드리러 가는 영화이다. 한시간 반 남짓한 영화에는 3명의 동방박사가 그저 사막을 걷고 화산지대를 걷고 바다를 만나고 다시 광야를 걸어 예수를 만나러 가는 풍경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 시작 40분이 흐르면 마리아와 요셉이 하염없이 앉아 짧은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이 20분간 이어진다. 그 후에 그 자리에 동방박사가 찾아온다. 경배를 드린다. 그리고 다시 떠난다. 영화 속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새들의 노래’에는 어떤 거룩함이나 성스러운 이미지 같은 건 없다. 계속되는 척박한 환경을 걷고 걷는다. 세명의 동방박사는 잠자리를 가지고 다투기도 하고 때로는 걷다가 발이 뜨거워 고통스러워한다. 바다를 만나면 수영을 하고 다시 걷는다. 사막에서 잠을 자고 동굴에서 잠을 자고 긴 여정을 보내며 아기 예수에게 도착한다. 카메라는 어떤 조명도 없이 트릭도 없이 그저 그들을 바라본다. 

성경에서 이미 알고 있는 별빛을 따라가는 신비로움이나 많은 회화를 통해 학습되어온 동방박사들의 권위, 심지어 시편 72편 10-11절의 예언을 토대로 한 왕의 이미지 같은 건 없다. 아기 예수도 특별한 아우라를 풍기지 않고 천사도 그저 보잘 것 없는 사람의 모양새다. 마리아는 양에게 손가락을 빨게 하기 위해 안달을 하는 조급하고 평범한 여자이고 요셉 또한 아무것도 없이 무기력한 모습이 역력하다. 동방박사들은 매우 늙거나 몹시 뚱뚱하거나 해서 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쓴 왕관이 힘겨워 보인다. 마리아는 예수대신 어린양을 안고 있다. 인류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 대신 성경의 예언대로 세상 죄를 지고 가야할 하나님의 어린양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영화속의 장면은 매우 아름답긴 하나 그 안에서 어떤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장치가 없어서 매우 건조하다. 계속되는 바람소리와 모래위는 걷는 소리, 풀 위를 걷는 소리만 들린다. 다시 말하면 영화를 한 시간 반 동안 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막에서 길을 잃어서 저 멀리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습을 8분 30초 동안 롱테이크로 찍은 모습을 지켜보느라면 나 자신이 저들보다 내가 더 난감함에 빠져있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러다가 세명의 동방박사가 예수를 만나 경배하는 순간 갑자기 카잘스가 연주한 ‘새들의 노래’가 흐른다. 박사들은 세가지 예물대신 왕관을 벗고 온몸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한다. 마리아의 품에는 어느덧 양 대신 아기예수가 있고 음악이 끝날 때까지 동방박사들은 그 장면속에서 한치의 미동도 없다. 그것을 천사가 보고 있다.

‘새들의 노래’는 카잘스의 고향 카탈로니아의 ‘새들의 캐롤’이라는 민요를 카잘스가 첼로로 연주한 것이다. 예수의 탄생을 새들이 알리고 기뻐하는 캐롤송이다. 그러나 카잘스의 연주는 간절하기 그지없다. 세상을 향한 구원의 절박함과 애절함의 탄식이 흐른다. 영화의 제목의 ‘새들의 노래’고 정말 ‘새들의 노래’가 흐는다. 마치 브레송의 사형수 탈옥하다가 제목이고 그 제목을 따라 사형수가 탈옥하듯, 혹은 영화 제목이 아리랑이고 정말 아리랑이 흐르듯 거기에는 아무런 미학적 인용들이 없다. 자칫하면 상투적이 될 수 있으나 알베르 세라는 새들의 노래를 들려주기 위해 영화에서 모든 이야기와 다른 음악과 상징과 은유를 배제했다. 

동방박사는 경배를 마친 후 다시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에 메시아를 만났으니 예언을 기대하며  구원의 천사를 기다린다. 그런데 천사는 이미 그 자리에 와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에겐 보이지도 않고 특별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영화 마지막에 그들이 옷을 벗어다 입었다를 반복하며 알수없는 행위를 풀샷으로 보여줄 때 동방박사들의 몸은 성배의 형상을 드러낸다(고 알베르 세라가 말했다). 다시말해 알베르 세라가 생각하는 구원이란 어떤 커다란 사건이 아니라 구원을 믿는 인간에게 이미 도착해 있어서 그 인간의 행위 안에서 발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장면을 목격하고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면 이상하게 평범한 일상이 거룩하게 느껴진다. 마치 명상을 마치고 받는 깨어있는 상태의 영롱함.

구원을 이야기 하는 많은 감독들이 있다. 예를 들면 레미제라블 같은 영화는 여기에 구원과 용서가 있다고 등장 인물들이 노래하고 외치며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하지만 브레송은 영화 ‘소매치기’에서 손의 숏트들로 화면을 채워나간다. 그리고 영화 속 손들이 표정을 갖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상하게 소매치기를 하는 그 손에서 구원에 다다르고 싶어하는 간절함 느낀다.

같은 말로 멜깁슨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관객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고통에 눈물 흘리게 하기 위해 그 무시무시하게 잔인한 장면들을 뻔뻔하게 보여줄 때, 알베르 세라는 그 대신 영화의 모든 내용을 지워버리고 자극을 지워버리고 텅 비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텅빈 이야기에서 동방박사들의 계속되는 고행의 발걸음을 보면서, 발걸음의 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를 향해 가는 그 발걸음에 이미 구원이 도착해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이어지는 진심의 경배. 진심의 노래.

이미지의 계보학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은 음악이다. – 레지스 드브레가 털어놨듯이 가장 가시적인 것은 그것이 비 가시적일 때다. 알베르 세라는 그런 방법으로 영화 안에서 구원을 이야기 하는 감독이다. 비로소 비워냈을때 은총이 들어갈 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삶의 고행. 행위의 반복. 그 안에 들어와 있는 구원. 영화가 끝나면 인간의 행위 자체가 거룩하게 느껴지는 낯선 경험. 영화에서 우리는 그 경험과 마주한다. 그리하여 이제부터 알베르 세라의 영화들은 나의 필견의 리스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