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크지쉬토프 키에슬로브스키의 tv판 십계 연작중 여섯번째 계명 ‘간음하지 마라’를 장편영화로 다시 편집한것이다.

당시에는 tv판 ‘간음하지 마라’를 먼저 본 후라 거의 동일하게 진행되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또는 그렇게 믿었다). 그때 십계 연작은 씨네필들에게 이거 안보면 영화 좀 안다고 안쳐줌 같은 존재여서 오리지널리티가 우선이라는 생각을 했던것 같다. 그리고 어제 왓차에서 정말 그냥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을 다시 봤다.

거의 같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단편 간음하지마라는 사랑의 환상과 역겨움을 통해 오이디푸스를 통과하는 청년의 성장기로 읽을 수(도) 있다. 고아원에서 자란 19살 토메크는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중년 여자 마그다를 망원경으로 매일 훔쳐보다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 사랑에 상처를 입는다. 도메크는 영화 마지막에 우체국에 찾아온 그녀를 거절하며 말한다. “이제 더이상 당신을 훔쳐보지 않아요” 여기서 사랑은 온전히 교류될수 없는것이다. 사랑이라는 환상은 깨지고 토메크가 그것을 깨닫는 이야기다.

하지만 장편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간음하지마라의 맞은편에 있다. 교류될수 없는 사랑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관해 이야기한다.

토메크는 마그다를 매일밤 훔쳐보다 드디어 그녀를 만난다. 그녀는 카페에서 토메크에게 다른 연인들처럼 자기 손을 만져보라고 한다. 거기서 토메크의 터치는 떨림과 위로의 손길이었다. 마그다는 토메크에게 사랑이란 그런것이 아니란 걸 알려주기 위해 자기집에서 토메크를 유혹한다. 나는 너를 원해서 이미 젖어있다고 말하고 자신를 만져달라고 한다. 마그다의 허벅지를 만지는 순간 토메크는 사정한다. 그리고  마그다는 그게 고작 사랑의 실재라는 것을 알려준다. 사랑이라는 환상이 실재와 마주한 순간 사랑은 자신은 손목을 그어버릴수 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사랑의 환상에 관한 일반적인 정의이고 tv판이 멈춰버린 지점이다.

그러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마그다가 병원에서 퇴원한 토메크를 보기위해 그의 집을 방문한다. 그리고 그녀는 토메크의 자살을 기도한 상처에 손을 댄다. 여기서 사랑의 전이가 생긴다. 마그다의 실재의 사랑이 환상의 사랑으로 넘어간다. 마그다는 토메크의 망원경으로 자기집을 바라보는데 거기 자신을 위로하는 토메크가 있다. 환상이 가동된다. 자신의 집 탁자위에 쏟아진 우유는 마치 토메크가 자살할때 퍼지던 피의 정화된 형태처럼 보인다. 그걸 본 다음 마그다는 눈을 감고 영화가 끝난다. 마그다는 토메크의 사랑으로 인해 실재에 눈을 감는다. 그리고 심지어 영화는 모든 이성을 동원해서 토메크를 스토커 변태라고 판단하며 영화를 보던 관객의 실재도 눈감게 한다. 사랑이란 환상이 실재와 마주할때 환상은 손목을 긋지만 실재는 다시 사랑이라는 환상으로 전이된다. 이것이 아마도 사랑이 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 때 히치콕과 더불어 정신분석학적 평론이 유행하던 시절 영화속의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모든 시선은 관음증과 욕망이라는 주제로 해석되었다. 시선이 나오면 영화자체보다 무조건 욕망이 마중나왔다. 이 영화도 반복해서 창문을 통해 타인을 바라보는 장면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관음과 욕망의 허세를 작동시키고 싶었다. 그러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그 자리에 다시 사랑을 가져다놓아야 한다는 사실은 문득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