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러너 2049

역시 드니빌뇌브 감독의 영화는 볼때마다 후회하지만 이번 블레이드러너 2049는 그중에서도 가장 좋지 않았다.

블레이드러너 2019가 당시에 우리에게 영화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알리며 철학적 질문을 던졌다면 블레이드 러너 2049는 그 질문이 아직도 유효한 논쟁거리인가 생각해봤어야 했다. 아쉽게도 이미 그런 주제는 너무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블레이드러너 2019에서 말하던 복제와 원본, 원본보다 더 원본다운 그 본질과 차이의 문제는 2017년에는 철학적 질문이 아니라 대중에게 먹히는 상품의 소비재가 되어버렸다. 대신 그자리에 리플리칸트 룻거 하우어가 미소지으며 죽어가는 고개숙인 숏트, 그 처연한 구원의 숏트, 또는 인물과 인물들의 대화사이 말보다 한템포 앞서는 이상한 침묵들, 거기서 나오는 암울함과 자포자기의 미래야 말로 세월을 견디며 오늘까지 블레이드러너를 버티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드니빌뇌브는 35년전 주제를 다시 가지고 와서 약간변형시켜 반복한다. 철지난 질문. 원본과 복제의 세계, 복제가 창조를 할때 과연 원본이란 무엇인가? 이 주제를 가지고 흡사 타르코프스키를 떠올리는 그러나 의미없이 긴 호흡들로 영화를 만들었다. 나는 왜 같은 주제를 가지고 35년을 통과하며 뻔하게 풀어가고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 여기에 드니빌뇌브의 어떤 세계가 있는 것일까? 비슷한 주제를 갖고 있는 미드 웨스트월드의 몇몇화는 얼마나 그것을 참신한 방법으로 풀어냈던가? 그리고 영화가 진부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나머지 2시간 30분은 소음만 가득했다. 결론적으로 블레이드러너 2049는 월레스가 데커드에게 선물하는 레이첼의 복제품. 그걸보는 데커드의 한마디 “그녀의  눈동자는 녹색이었어”. 다시말해 실패한 복사본. 내가 딱 그 기분이었다. 오늘 다시한번 느꼈는데 드니빌뇌브의 영화는 늘 있어보이게 만들고 그 안은 일관되게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해리슨 포드를 제발 과거의 영화들에서 그만 불러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