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크백 마운틴

1997년 왕자웨이의 <해피투게더>는 동성애를 다루었다는 이유로 수입이 금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조차 <해피투게더>는 일반인의 관람이 금지되었다. 해피투게더는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거머쥐었지만 한국에서는 1년 후에나 그것도 잘린 필름으로 상영되었다. 이유는 국민의 보편적 정서와 윤리에 반한다는 것. 당시에 보편적 정서의 기준이 심의위원들의 정서인지 국민 48,396,208명 중 48,396,207명 붉은악마만큼을 가리키는 것인지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랬다. 친구는 일본에서 보고 와서 자랑했다. “그 영화는 빛에 관한 영화던데.” 맞는 말이었다. 그 해에 불법 복사본으로 시네마테크에서 본 해피투게더는 열악한 환경에서는 아무 감흥도 받을 수 없었다. 말하자면 당시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는 일 년 만큼 우리에게 동시대의 문제를 경험할 수 없게 한 ‘빚’을 진 셈이다.

2006년 이 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은 15세 관람 가를 받았다. 게다가 남자들의 정사신이 무삭제인체로 상영되었다. 오히려 ‘15세면 중학생 관람 가인데 이거 괜찮은 건가?’라고 스스로 반문할 정도다. 이렇듯 한국의 상황은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반드시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은 가치관의 변화라기보다는 금기가 상품화 되는 시대의 한 단면 일수도 있는 것이다. 한 정치인은 정치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여기자의 가슴을 만졌다는 이유로 그의 정치생명 끝자락에 도착하게 되었으며 연일 뉴스에서는 아동 성 추행범 이야기를 오르내린다. 또는 뉴스의 소재가 되려면 100여명 연쇄강간을 저지른 성폭력범정도 되어야 한다. 매스컴은 그에게 ‘발바리’란 애칭을 선물했다. 더 이상 사람들은 말세라고 하지만 그 말세의 소재로부터 눈을 돌리지 못하고 브라운관으로 스크린으로 몸과 마음을 고정한다. 바야흐로 금기를 즐기는 리얼리티 쇼의 시대인 것이다.

1963년 와이오밍 주. 와호장룡의 리무바이와 용이 어디선가 공중을 날고 있을 듯한 거대한 브로크백 산맥을 풍광으로 대지를 밟고 있는 두 카우보이가 있다. 에니스와 잭은 둘 다 가난한 청년으로 떠돌아다니며 삶을 이어가다가 여름 한철 브로크백 산에서 양떼를 방목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둘은 그곳에서 사랑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것이 사랑인 것을 각성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게이가 아님을 다짐받지만 결국 그것은 사랑이었다. 에니스는 과묵하고 마초적인 인물이고 반면 잭은 에니스의 이혼소식을 듣고 기뻐서 먼 길을 한걸음에 달려오는,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인정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극보수가 창궐하던 1960년대이다. 에니스는 사회가 요구하는 관습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영화는 이 둘의 불가능해 보이는 20년간의 사랑을 지켜본다.

자. 이들은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스스로 어떤 규칙을 지켜야 하는가. 무엇보다 ‘사랑한다’ 말하지 말 것. 특히 에니스는 미국 보수주의의 가부장적 가장을 꿈꾸는 남자였기 때문에 잭을 ‘사랑한다’ 말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큰 상처를 입히는 일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사랑을 말하지 않는 사랑영화다. 사랑을 말하거나 드러낼 수 없으니 말로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당연하게 눈물을 보이는 것도 금지되고 그래서 둘은 서로에게 주먹을 날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주먹이 결국 자신을 가장 크게 자책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를 마주보며 응시하지 못한다. 에니스가 엘마와 결혼할 때 주례사는 “키스 하세요. 안하면 제가 합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것이 잭을 마주하고 있으면 불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둘은 등 뒤로 감싸 안아야만 하거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불안한 입맞춤을 한다. 그래도 쉽게 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애니스를 위해 카메라는 함부로 파고들지 않는다. 서로에게 “난 게이가 아냐.”라고 말할 때 잭의 경우는 얼굴을 잡지만 애니스의 경우에는 등을 잡는다. 또한 에니스가 잭의 사망소식을 엽서로 확인하는 순간 카메라는 갑자기 에니스의 등 뒤로 도망간다. 거기에는 에니스의 절망의 표정을 양보하는 카메라의 진심이 담겨있다.

에니스는 엘마와 이혼하고 쓸쓸한 삶과 피곤한 노동을 동반한다. 이 순간 영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계급과 게이를 위치를 병치 시킨다. 그 위치를 위해 투쟁하지는 않지만 순간 퀴어 영화의 전통이 들어선다. 그건 사람들이 아무리 게이영화가 아니라고 해도 게이가 등장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사회 안에서 가족 안에서 갖게 되는 위치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거기에 투쟁했다가 죽어가는 잭을 보면서 대표적 게이 아이콘인 아이다호의 기면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지는 마이크(리버 피닉스)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다른 쪽으로는 가장 미국적인 영화인 서부영화가 위치해있다. 존 포드의 영화가 그 중심에 있다면 오른쪽으로는 더는 총 쏘기를 포기한 <용서 받지 못한 자>가 있고, 왼쪽엔 대결을 하는 카우보이가 아닌 가난한 생계수단으로의 카우보이, 가치와 질서를 지켜내기 위해 총을 뽑는 대신 가치와 질서를 위반하며 동성의 사랑을 선택하는 <브로크백 마운틴>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정말 뛰어난 점은 마지막 에니스의 대사에 있다. 에니스가 잭의 옷을 만지며 “I Swear” 라고 목적어 없는 대사를 하고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말은 영화의 이미지와 빈 여백들을 봉합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브로크백 마운틴>이 여백의 영화, 생략의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이 영화는 여백과 생략을 채워가는 영화다. 에니스가 말한 무엇을 맹세하는지 모르는 그 맹세는 영화에 등장할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 즉 잭이 말할 수 없었던 ‘자신만 바라봐 달라는 것’에 대한 답변이고 잭을 똑바로 바라보면 안을 수 없었던 그 시선에 대한 맹세며 잭의 부고를 받는 순간 보여줄 수 없었던 눈물이다. 또한 20년의 세월을 떳떳한 척 하기 위해 세상과 잭 모두를 피해 숨고 싶었던 삶의 후회이며 자신의 정체성의 확신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에서 한 번도 말할 수 없었던 ‘사랑’이라는 단어에 관한 맹세가 된다. 그 한마디에 심지어 <아이다호>의 버림받고 길 위에 쓰러진 리버피닉스까지 벌떡 일어날 지경이다. 그리고 이 봉합은 미학적으로도 <매그놀리아>에서 마지막에 쏟아져 내리는 개구리 우박에 견줄만한 경지이다. 개구리 우박이 이미지로 이야기를 봉합한다면 <브로크백 마운틴>은 대사로 이야기를 봉합한다. 무엇보다 영화 속에서 시나리오란 미학적 차원에서 항상 낮은 위치로 생각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사랑이 숭고하다 불리는 이유는 사랑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 사랑이 와서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픔은 브로크백의 풍광처럼 눈부시기 마련이다. 에니스가 잭의 엽서를 보고 옷장을 닫는 순간 엽서 속 브로크백 풍광이 그에게 밀려 들어온다. 그리고 장면이 컷 되고 옷장이 닫힌다. 에니스는 맹세한 대신 평생 쓸쓸할 것이다. 나는 이것이 너무 슬퍼서 주체할 수 없었고 함께 본 지인은 해피엔딩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우리는 모두 카우보이의 건투를 빈다. 그리고 <브로크백 마운틴>은 숭고한 걸작이라는, 수사학이라고는 모르는 유치한 광고의 헤드카피에도 동의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