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에서 생각한 스토커와 라이프 오브 파이

오늘은 청량산 밑자락 어느 순두부 집에서 밥을 먹었다.  반찬이 많은 것이 미덕인 한국사회에서 5천원을 받고 이런 상차림으로 장사를 한다는건 여간한 배짱이 아닐것이다. 동시에 이루어내는 어떤 신뢰성. 이 꾸미지 않은 소박함에 진정성이라 믿고 싶은 마음이 슬며시 자리한다. 실은 정말 이 집이 어떤 재료로 순두부를 만드는지 알수는 없다. 마치 비슷한 모양새의 을밀대가 사실을 미원범벅이었던 것처럼 현실은 나의 생각과는 다를수 있다. 그러나 이 집의 깨끗한 고소함만은 환상적이다.

그리고 나는 이 소박한 밥상을 마주하면서 화려한 이미지의 두편의 영화를 생각했다.

박찬욱의 스토커는 매혹적인 몇가지가 있다.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로 가득한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영화 [싸이코]의 집과 같은 3층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각 층의 역활도 동일하다. 지젝이 싸이코에서 해석한대로 에고, 수퍼에고, 이드로 구조를 나누어 놓고 흡사 ‘살해씬 욕조’의 배수구 같은 머리를 한 고모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 고모가 살해되는 시퀀스는 소문처럼 인상적이다. 그것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고모와 인디아의 장소의 교차편집으로 시작해서 갑자기 고모와 가정부의 현실과 과거의 시간의 교차편집으로 전환시켜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가 인디아의 머리를 빗겨주면서 머리칼이 풀숲으로 변하는 장면들도 설득력이 있다. 풀 숲이 보여지는 사냥의 이야기는 인디아의 머릿속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식탁에서의 3인의 대화장면들  쇼트, 리버스 쇼트들도 꽤나 공들여 만들어서 그 쇼트들은 이들의 관계를 이미 복선으로 다 말해준다.

삼촌 찰리스토커는 싸이코의 노먼 베이츠를 빼다 닮았다. 극 후반에 가면 성격도 닮는다. 하지만 찰리는 스토커 가족에게 죽은 아버지의 대체품이다. 어머니는 딸을 낳은후 자신을 멀리한 남편 대신 그 자리에 찰리를 세워놓고 사랑을 갈구한다. 그래서 “찰리는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빼닮았다” 라고 이야기 한다. 반면 인디아에게 삼촌은 일렉트라 콤플렉스로써 아버지의 대체물이다. 같은 여성으로서 엄마와 경쟁하기 위해 근친상간을 욕망하는 대상. 그 대상은 아버지이지만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대체물인 찰리가 자리하는것이다. 그래서 피아노 이중주 씬에서 그녀와 피아노를 치는건 실은 삼촌이 아니라 그녀 심연속의 아버지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초반에 피아노를 못친다고 했던 삼촌이 그녀와 이중주를 연주할수 있는 것이며, 인디아의 욕망이 발동하는 것이며, 연주가 끝나자 갑자기 삼촌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도 그러하다.  그래서 인디아는 그 아버지의 형상(찰리)을 죽여야 일렉트라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비로서 어른이 될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삼촌 찰리는 아버지가 아니다. 그가 아버지와 다른점은 찰리는 살인은 한다는 점. 그래서 말하자면 찰리는 자신의 존재의 소멸을 막기위해 영화에서 살인을 하는것이다. 인디아에게 아버지가 아닌 삼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살인을 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의 살인은 스스로에게 정당하다.

이렇게 여러 메타포를 가지고 얽어놓아서 읽는 방향에 따라 서사의 구조가 여럿이 된다.(그러나 나는 몇몇의 박찬욱 영화가 그랬듯이 여러 이야기를 나열하고 디테일에 관심을 갖다가 스스로 길을 잃어버리는 느낌을 받는다)  한쪽에서는 소녀의 성장기(일렉트라 콤플렉스)를 이야기 하는데 엄마의 입장으로 보면 모두에게 버림받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한쪽에선 장르영화로써 삼촌의 행위들이 펼쳐진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해 나는 이 영화에 동의할 수 없다. 박찬욱은 의미없는 멋으로 영화를 치장해 놓았다. 나는 이미지의 과잉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인디아가 친구 윕을 땅속에 뭍고 온 다음 샤워실에서 옷을 벗는 장면은 이해할수 없는 시간의 편집을 해놓았다. 영화가 만일 영화언어로 되어있는 것을 믿는다면 이 영화는 이런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그녀가 샤워실로 와서 수건을 깔고 신발을 벗고 옷을 벗었다. 그리고 욕조로 향했다.’ 이 문장을 가지고 ‘수건 깔고 욕조, 그녀는 벗었다. 향했다. 그리고 신발, 샤워실로 와서 옷을’ 이렇게 스크린에 쓰고 있다. 이게 대체 무엇일까? 이것이 정당화 되려면 그녀가 정신 분열증을 앓고 있거나 모든것이 그녀의 환상이어야 한다.

영화속에서는 화려하지만 무의미한 편집과 카메라워킹이 난무한다. 히치콕의 사이코에는 노먼 베이츠가 엄마를 안고 2층의 방에서 계단을 내려가기 전 계단을 공중부양하는 카메라의 유려한 크레인쇼트가 있다. 사실 이것은 그곳에 박제되어 있는 새들의 시선이다.  종종 영화속에서는 빈 방을 이 시선이 살아서 흩고 지나간다. 그 박제된 새들은 베이츠 엄마의 욕망인데 2년후 영화 ‘새’로 살아서 움직이게 된다. 그래서 영화 싸이코에서 가장 무서운건 카메라의 시선이다.

스토커에도 그와 비슷한 크레인샷들이 나온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단지 아름답기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2층 계단에서 찰리가 인디아에게 진실을 이야기 하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찰리의 주위를 계속 도는데 대체 이 진부한 씬은 뭘까 생각했다. 찰리와 이디아가 피아노 이중주 씬도 너무 뻔해서 보는내내 지루했다. 음악을 관통하는 욕망을 그렇게 대놓고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면들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도했다. 사유는 나아가려는데 왜 이토록 형식은 진부할까 영화를 보면서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문제의 샤워자위씬은 어쩌자는건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살해를 하고 그 댓가로 죄책감이나 혹은 살인을 통해 깨닫는 금기된 욕망에 의해 인디아의 자위행위가 작동된다면 반드시 살해를 한 후 자위의 씬이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 박찬욱은  살해와 자위를 교차편집으로 붙여놓았다. 그 순간 살인과 쾌락은 동의어가 된다. 나는 절대 이 장면을 교차편집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영화의 윤리를 끌어오는 순간 나는 이 영화의 편에 설수가 없다. 그러나 끝내 영화는 진행되고 박찬욱은 살해가 쾌락인 소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시말해 이디아에게 살인는 그냥 자위고 자위는 살인인것이다. 삼촌은 스스로의 소멸을 막기위해 영화에서 살인을 하지만 이디아는 금지된 쾌락을 위해 살인을 한다. 이 불편한 대상을 관객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걸까? 게다가 이 장면은 편집이 너무 이상해서 마치 윕이 두번 죽는것처럼 보인다. 이 과도한 편집들. 박찬욱은 무엇이 두려워서 이렇게 극적효과의 31가지 배스킨라빈스 형광색 처리를 해야하는 것일까?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괴롭다.

영화속의 이미지는 정말 중요하다. 나는 그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아핏차퐁의 미장센을 생각해보자. 그는 그것이 영화적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이상하게 관객은 거기에 서 있게 된다. 그런데 박찬욱의 이미지는 바라보는 대상일 뿐이다. 만질수 없는것. 저기 백화점의 쇼 윈도우 같은것. 김지운, 임상수 모두 실패하는 그자리.

다음에 생각한 영화는 이안의 라이프 오브 파이이다. 이것도 이미지의 향연으로 가득한 영화다. 내 생각에 라이프 오브 파이는 영화를 정의하는 가장 나쁜 예일 것이다. 일단 라이프 오브 파이는 1시간 40분정도 거짓말을 한다. 거기에 화려한 이미지들로 가득해서 우리는 정말 그것을 믿고 싶어진다. 그 다음 비극적 진실을 10분동안 파이의 증언으로만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너무 잔혹해서 감히 스크린에 펼치지 않는다. 그 다음 영화는 질문을 한다. 당신은 어떤것을 믿겠습니까?

당근 나는 실재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현실의 반영. 실재의 거울. 나는 그것이 두려워서 엄마를 오랑우탄으로, 불교신자를 얼룩말로, 요리사를 하이에나로, 자신을 호랑이로 치환시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안이나, 영화속의 보험회사 직원이나, 그 이야기를 듣는 소설가 모두 현실의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파이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상상에 동의한다. 아연질색, 망연자실. 이 영화를 본 나의 소감이다. 영화는 꿈의 공장, 당신은 무엇을 믿겠습니까? 여기서 꿈은 현실도피가 아니다. 현실과 맞서는 이상이다. 하지만 모두들 이 섬찟한 영화가 아름답다고 한다. 소년은 현실대신 상상을 붙잡고 비극속에서 살아남았다. 그래서 상상속의 자신인 호랑이가 심연의 숲으로 사라지자 파이는 현실과 마주하고 울어버린다.

다시한번 질문. 빨간약 파란약. 당신은 어떤것을 선택하겠습니까? 당신도 살아남기 위해서 가짜를 선택하겠습니까? 엄마가 상어밥이 되었는데 바다에서 고래가 뛰어오르는 환상을 꾸는 파이에 동의 하시겠습니까? 이 영화의 환상에 동의하신 수많은 평론가들과 리뷰어들은 현실대신 박근혜정부의 TV속 아름다운 세계가 펼치는 매트릭스를 향유하는것에 동의하시겠습니까?

나는 영화가 눈감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현실을, 자신을.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가 이상하다.

성룡의 기이한 율동이 보고싶어서 차이니스 조디악 보자는데 다들 싫다네. 얼마나 주옥같은 영화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