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이전의 침묵

그동안 많은 ‘영화’음악들이 있었고 ‘음악’영화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정작 영화’음악’을 본 기억은 거의 없다. (고다르의 미녀갱 카르멘은 아직 음악의 형식과 영화의 형식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영화의 쇼트가 음악의 마디와 어떤식으로 관계하는지 연구해보진 못했다. 이것을 대학원 논문으로 쓰고 싶은데 음악대학원 기악과에서 영화와 음악의 관계가 심사 통과할수 있는 확률은 없다고 본다) 나는 이 셋의 차이가 아주 크다고 생각한다. ‘영화’음악이란 음악이 영화에서 감정이입을 위해 사용되는 경우다. 혹은 그 반대로 감정에 이입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경우다. 이 두 경우의 공통점은 이것의 본질이 ‘영화’라는 것이다. ‘음악’영화는 음악을 위해 제작된 영화. 혹은 음악에서 상상되는 이미지를 프레임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두번째의 경우는 개인적으론 거의 사라졌으면 하는 장르다. 왜냐하면 음악을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시키려고 하는 순간 음악의 순수한 예술성은 박제되고 만다. 도와 레 사이의 무의미함을 숏트와 숏트의 몽타주 이데올로기를 통해 보여줄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바이올린 플레이어에서 바흐의 샤콘느가 흐를때 어두운 하수도의 노숙자들이 빵을 먹는걸 보노라면 실소를 금할수가 없다. 혹은 뮤지컬 장르는 왜 영화로 만드는지 알수가 없다. 뮤지컬를 보고 싶다면 무대로 가기 바란다. 거기서 직접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살아있는 사람들을 보면 된다. 마지막으로 영화’음악’이 있다. 나는 이것이 영화와 음악이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예술성을 관찰하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이야기 하면 음악을 보여준다는 문제를 고민한다는 뜻이다. 바흐 이전의 침묵을 월요일에 보려 했으나 시간이 맞질 않았는데 다행이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영화의 시작을 보면 갤러리에서 음악을 보여준다. 음악이 흐르면서 그 정서를 이미지로 치환하는 것이 아니라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는 피아노(아마도 피아노 포르테 같다)가 등장하더니 그야말로 음악을 보여준다. 여기서 연주자가 연주를 하면 그 순간 우리는 연주자를 보게된다. 연주자로 부터 나오는 음악을 보게된다. 그러면 그순간 이것은 ‘음악’영화가 된다. 반대로 음악만 흐르고 갤러리의 공간을 보여준다면 ‘영화’음악이 된다. 그런데 영화는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연주자가 없고 우리는 갤러리에서 음악을 ‘보게’된다. 피아노는 단지 음악에 따라 춤춘다. 여기에 주인공은 음악이고 영화는 그것을 스크린에 투사한다는 영화적 임무를 다한다.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이 영화가 영화’음악’으로써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알수 있다. 이 외에도 많은 짧은 클립들을 보는 순간마다 전율을 느꼈다. 단 최악의 예도 있는데 한국판 예고편이다. 바흐의 음악을 낭만주의로 해석해놓은 임형주의 버라이어티한 음악을 ‘보고’있자니 개봉날 가서 임형주가 설명하는 관객과의 대화를 듣지 않은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하여간 나는 이 영화를 스크린에서 만나길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