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데이즈

타쿤은 밀림으로 간다. 살아남기 위해 왕가위의 사람들은 먼저 버리거나 거절을 한다. 살아남기 위해 차이밍량은 과장된 노래를 불러야 하고 끝내 버티고자 구스 반 산트의 인물들은 걷는다. 사막을 걷고(GERRY) 복도를 걷고(엘리펀트) 숲속을 걷는다.(라스트데이즈) 그리고 그것을 멈추는 순간 그 도착지에는 죽음이 있다. 죽이거나 죽거나 어떻게든 그것만이 모든 것을 해소시킨다. 소통은 어차피 불가능하므로 방법은 그것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껏 나와 당신 또는 내 삶과 세상의 방식에 관한 단절을, 이 서로 다른 자아를 이루는 공간을, 마음의 풍경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영화의 임무이고 컷트를 나누고 다시 붙이고 씬과 테이크, 샷과 리버스 샷을 생각하고 미장센을 논하고 쁠랑세깡스, 롱테이크, 롱샷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영화광이 되기위해 익혀야 하는 모든 단어는 대부분 이미지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라스트데이즈가 도착했다.

1927년 최초의 유성영화 <올 댓 재즈>로 부터 거의 80년 만에 도착한 이 영화는 영화에서 사운드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물론 사운드의 대가들이 있다. 먼저 장 뤽 고다르 – 사운드를 숏트처럼 나누고 붙이고 소외효과를 주고 또는 브레송처럼 반복적이고 독립적인 음악과 주인공의 나래이션, 미카엘 하네케의 소음과 묵음을 통한 충격요법, 데이빗 린치만의 그 이상한 립싱크의 세계, 최근의 기억으로는 아핏차퐁의 열대병과 장율의 망종까지 작가들은 점점 더 사운드의 비중을 이미지만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미지가 이미 찍어 놓은 시간을 되풀이하는 동안 사운드의 역할은 현장감, 이미지의 뒷편에서 지금 여기에 벌어진다는 사실감을 느끼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런데 라스트 데이즈는 반대의 방법을 택한다.

사운드의 음향에 따라 이미지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브레이크, 말하자면 절망의 환각에 사로잡힌 록커 커트코베인의 세계는 이미지의 풍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풍경에 있는 것이라고 구스 반 산트는 생각한다. 또는 결국 나와 타인의 불가능한 소통은 문제는 결국 보이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소리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주인공 브레이크를 형성하는 것은 사운드이다. 그래서 브레이크가 등장하는 씬의 숏들은 사운드에 따라 나뉘었다. 브레이크가 티비를 켜면 보이즈 투 맨의 노래가 흐르고 티비속의 뮤직비디오는 사운드의 현재성과는 관계없이 쇼트를 리듬에 따라 장식하고 편집한 장면들이 지나간다. 그런데 그 티비 브라운관을 지켜보는 영화의 카메라는 그것을 나누지 않는다. 보이즈 투 맨의 노래가 주체가 되는 순간부터 노래가 끝날 때까지 계속 지켜본다. 여기에 구스 반 산트가 생각하는 영화의 사운드에 관한 고민이 들어있다. 결국 영화에서 사운드란 지속적 현재성을 담아내는 것. 많은 대가들이 영화의 이미지를 통해 시간의 지속성을 잡아내고자 할 때 구스 반 산트는 사운드를 통해 시간의 지속성을 잡아낸다. 그래서 사운드가 갖는 시간의 지속성과는 관계없이 이미지를 나눈 보이즈 투 맨의 뮤직비디오를 브레이크는 켜놓고도 듣지 못한다. 그 장면과 댓구를 이루는 장면으로 브레이크가 death to birth를 노래하는 장면이 있다. 사운드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 영화는 이 장면을 어떻게 치장할 것인가를 포기한다. 아무것도 보여줄 생각을 안 한다. 거기엔 그저 소리가 있다. 더우기 브레이크가 도노반 때문에 집을 도망 나온 후의 풍경, 즉 연습실에서 기타를 만지고 드럼을 만지고 음악의 풍경이 시작되자 창밖에서 브레이크를 쫒던 카메라는 갑자기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다. 사운드가 주체가 되자 들려주기 위해 완전히 카메라는 물러난다. 보통의 영화가 카메라가 점점 대상으로 부터 멀어져 인물에서 풍경을 잡기 시작하면 소리도 점점 작아져야 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사운드는 이미지의 원근법을 무시하기 시작한다. 카메라가 멀어질수록 사운드는 점점 폭발하고 그것만이 브레이크의 내면이 된다. 결국 브레이크에게 이 세상은 소리인 것이다.

저녁. 브레이크의 저택에 친구들이 도착하고 턴테이블의 레코드가 돌아가고 음악이 나오자 스콧이 노래를 따라 부른다. 마치 데이빗 린치의 립싱크처럼 사운드가 주체가 되고 이미지는 따라간다. 그러나 스콧과 루크의 세상은 몇 개의 컷으로 나뉘어 보여준다. 같은 장면의 반복. 브레이크가 주체가 되었을 때 화면은 하나의 숏트가 하나의 씬이 된다. 전화번호부 광고 직원이 왔을 때의 대화에서도 카메라는 오직 브레이크가 의식하는 대화의 시간만을 담기위해 보여주는 역할을 포기한다. 스콧이 같은 자리에서 몰몬교도 들과 대화를 할때 화면은 여러 개의 숏트로 나뉜다. 서로 다른 소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브레이크와 친구들은 소통하지 못한다. 브레이크가 도노반과 형사를 피해 집에서 나오는 장면이 두 번 반복된다. 한번은 집에서 나오자마자 물소리가 들리고 카메라가 숲을 통과해 강을 비추는데 같은 장면의 시간의 병렬적 표현에 의한 반복에서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러자 카메라는 숲에서 멈추고 바람 소리를 듣는다. 어떤 소리가 들리느냐에 따라 무엇을 보여줄지가 결정된다. 이렇게 사운드가 주체가 될 때 이미지는 많은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없다. 그래서 필름은 1.33:1의 비율을 택하고 브레이크는 프레임 안에 갇혀있고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탁 트인 풍광이 아닌 좁혀진 정사각형이다. 심지어 차에서 대화하는 사립탐정과 도노반의 씬에선 앞 유리의 풍경을 반사시켜 영화는 의도적으로 이미지가 보이는 것을 방해한다. 오로지 대화만이 분명하게 인지된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롱 테이크 들은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소리의 모양을 잡아내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브레이크가 자살하기 전까지의 그래서 죽음부터 탄생까지 너무 외로운 여행이라고 절규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슬프고 감동적이기만 했다면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영화가 어디까지 도약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다.

라스트 데이즈는 영화에서 사운드의 주체적 역할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끌어 냈다 . 마치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이 아무리 비극적 삶을 다룬다 해도, 또는 브레송의 호수의 란슬롯에서 병사들이 전원 몰살 당하는 그 절망적 순간을 그려내도 그 당시 그의 영화의 새로움을 발견한 이들에게 마치 황금을 발견한 기쁨을 주었듯이 라스트 데이즈는 도저히 슬플 겨를이 없는 영화다. 라스트 데이즈는 나와 당신 또는 내 삶과 세상의 방식에 관한 단절을, 이 서로 다른 자아를 이루는 공간을, 개인의 마음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들려주고 있다. 영화란 정말 도대체 무엇일까 – 를 생각할때 현재 현존하는 감독 중 고다르는 항상 맨 위에 있기 마련이다. 라스트 데이즈를 보고 나오면 구스 반 산트는 곧 고다르와는 다른 방법으로 고다르의 경지에 다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