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나는 영화에서 음악이 사용될 때 음악이 독립적으로 쓰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것이 영화와 음악 모두의 예술성의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는 예의라고 생각한다. 구스 반 산트는 영화에서 음악을 함부로 잘라내지 않는다. 긴장감의 고조나 극적인 연출을 위한 부자재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다. 고다르의 경우는 오히려 음악을 절단함으로 음악의 고유영역을 드러낸다. 브레송은 음악의 마디를 반복함으로써 음악이 주는 어떤 숭고함을 찾아냈고 키에슬롭스키는 영화 블루에서 샷 다음의 리버스 샷에서 화면을 지우고 음악을 넣었는데 그것이 샷을 개념을 넘어서 버렸다.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에서 음악은 세상을 향한 간절한 기도이고 다르덴 형제는 음악을 사용하지 않음으로 음악의 존재감을 확인시킨다. 반면 영화 바이올린 플레이어 같은 영화는 음악의 위대함에 영화 자체의 존재감이 무력화되었다. 마지막으로 뮤지컬 영화는 내가 절대 보지 않는 장르다. 기회가 된다면 대학원을 마치고 영화음악에 관한 공부를 하거나 글을 쓰고 싶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건 이런거다. 갑자기 이은미 생각이 난다. “얘는 말하고 싶은게 많아서 글이 어수선하고 다 따로 놀아.” 인물을 프레임에 혼자 가두는게 마음이 시려웠던건 역시 오즈 야스지로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건 오즈는 인물을 항상 단독으로 정면에 배치했다는거다. 오즈는 그렇게 사람들을 찍고 자신도 그렇게 세상에 혼자 가둬버리고 죽었다. 그래, 당신이 듣고 싶어하는 진실. 거기서 나는 가끔 나를 본다. 때때로 어떤 영화에서는 인물간의 단절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물을 프레임의 구석으로 가둔다. 예를 들면 왕가위의 2046도 그런데 이럴 경우는 그저 담담할 뿐이다. 영화가 나 지금 외롭고 쓸쓸해- 라고 외부에서 강요하는 순간 그건 이미 바라보는 이의 감정 밖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대가의 영화들은 정교하게 계산한 후 무심한척 한다. 물론 나도 왕가위의 홍콩 반환전의 영화들의 열혈 팬이긴 하다. 왕가위의 영화에선 항상 지금 여기에 버려진 사랑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항상 청춘이다. 오즈의 영화에선 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삶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처음부터 현자였다. 그리고 구스 반 산트의 영화에서는 그 사람의 내면의 풍경이 중요하다. 그는 무엇이든 외부의 사건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마음속의 풍경으로 바꿔버린다. 그리고 난 세번째가 가장 맘에 든다. 프레임안에 몇명이 있는가는 사실 부가적인 문제다. 영화 GERRY의 예를 보더라도 저 둘은 항상 프레임에 같이 있지만 늘 질문한다. 나는 여기 있는데 너는 왜 거기 있지?  중요한건 그 순간에 그걸 찍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가이다. 영화 밀크에서 사람을 나누지 않은 프레임이 ‘따스한’건 그 영화의 주제가 “희망”이기 때문이다. 영화 GERRY에서 저 둘, 제리와 제리를 나누지 않은 프레임이 쓸쓸한건 저들이 도착하는 곳이 결국 마음이라는 지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