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따뜻한 색 블루

어느 감독의 인터뷰서 ‘돈이 안됨에도 불구하고 대중과 타협하지 않고 영화를 찍는 이유는 세상 어딘가 한명의 관객이라도 제 진심을 알아주고 찾아와줄꺼라는 믿음 때문입니다.’라는 글을 읽었었다. 나는 글을 읽으면서 내가 그런 관객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었었다. 그리고 여러 영화정보들을 보면서 내가 올해 첫번째로 봐야할 영화는 소쿠로프의 다큐멘터리 ‘영혼의 목소리’라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무려 5시간 28분 짜리 이 영화는 이틀에 나눠서 할뿐더러  여러가지 악조건을 골고루 갖추었다. 그 영화가 요즘 나의 무의미하고 더러워진 타협의 삶에 살아있을 이유를 찾게 해줄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어쨌거나  백가지 핑계를 대며 가지 못했다. 아니 가지 않았다. 나는 그 한명이 될수 없었던 걸까. 파리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보다 먼 서울아트시네마여.

인천의 시네마테크에서 본 압델라티프 케시시의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다시한번 세계영화제 그랑프리와 나는 취향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칸 영화제에 비교하자면 나는 주목할만한 시선 쪽이 훨씬 내가 생각하는 영화와 닮아있다. 물론 가장따뜻한 색 불루는 이마를 잘라버린 얼굴의 클로즈업으로 인물들의 내면을 드러내는 섬세한 프레임. 새로운 씬이 시작되자마자 느닷없이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들. 뒤이어 바로 붙는 담담한 표정의 수업들은 얼마나 앞뒤에 많은 장면들을 연기하고 잘라냈을지 짐작이 간다. 압둘라티프 케시시는 무엇보다 사랑의 낭만을 믿는 사람이다. 홍상수나 브레송이 표정을 지워버린 배우들과 반대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얼굴로 영화를 이끌어간다. 거기에 몸에 대한 욕망이 있고 버림받음에 대한 좌절이 있다. 구구절절 화면가득 사연어린 얼굴이 프레임을 가득 매운다. 나는 사랑의 낭만성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너무나 고전적이다 못해 상투적인 영화의 문법들. 은유들.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라는 제목처럼 대놓고 나오는 파란색의 머리와 파란색의 드레스. 그리고 색체의 대비가 대놓고 나오는 미장센들. 식욕과 성욕의 메타포들. 소설에서 빌려온 대사들. 철학에서 빌려오는 정의들. 회화와 조각에서 빌려온 육체와 정사씬들, 나는 이영화가 영화적 쾌감이기 보다는 영화가 얼마나 다른 예술을 차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될 뿐이었다. 특히 섹스씬은 느닷없이 커트되는 쇼트들로 인해 영화가 얼마나 많은 장면들을 찍고 또 찍은 다음 편집을 한 것인지 짐작케 하지만 그 편집의 배열은 의미없이 붙여져서 섹스가 실패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남성성의 위협으로 부터 벗어난 이 두 여성의 성관계에 존재하지 않는 남근이 씨퀀스의 중심에 있는것은 매우 인상적이나 어디까지나 그건 영화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분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대신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은 대화에서 계속 반복되는 샷 리버스 샷들. 눈썹에서 그 아래로만 촬영된 인물들의 클로즈업, 그 프레임속 시선의 교차와 입술의 표정을 잡아내고  계속 밀어붙이는 뚝심. 오히려 난 욕망이 아니라 욕망이 발현되는 눈과 입의 행위에 관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그 공들인 씬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에도 불구하고 미카엘 하케네의 아무르를 봤을때와 같은 그 실망감. 이미 영화를 너무 많이 봐버린 나에게는 뻔한 이야기. 보편적 결말. 창조적 영감대신 지루한 3시간 이었다. 영화는 나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늘 생각하지만 배우가 연기를 잘못하면 영화는 코미디가 되버린다. 그런데 영화가 배우의 연기에 몰두하는 순간 카메라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늘 뒤쪽이 예술로써의 영화를 더 위협한다고 생각한다.